<맥짚기>점보는 신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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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조선의 민중은 예부터 그들의 생활에 작용하는 불가사의한 힘의 존재를 믿어왔다.』일제 총독부의 촉탁으로 조선민중에 대해 연구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선팔도 민초들의 생활을 현장조사한 뒤 내놓은 보고서의 첫머리다.65년전 그의 주 장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PC통신 역학동우회(하이텔 「역학동」)에서 회원의 사주를 봐주고 있는 아마추어 역학자 박영창(40)씨는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더 역학에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93년말 이후 지금까지그가 컴퓨터를 통해 사주를 봐 준 사람만도 1만명 에 육박한다고 한다.지난 4일 개설된 유니텔「사주도사」에는 하루만에 1만명 이상이 조회를 했다.무료로 영화를 보여주는 「호암 아트홀 시사회」안내보다 많은 조회수다.
「신세대와 역학」「컴퓨터와 점」.왠지 어색하게 들린다.전자신호와 논리적 기호에 익숙한 신세대들이 비합리적이고 운명론적인 역학에 관심이 높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모순같은 두 가지가신세대들의 머리속에 갈등없이 나란히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은 그들 세대가 처한 특수한 사회환경,그리고 그들이 한국인의 일부로서 가지고 있는 문화전통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신세대들은 「불가사의한 힘」에 의존하는 이유를 『불안하니까』라고 말한다.그들 세대가 직면한 가장 큰 불안은 「결혼」과 「취업」이다.
결혼이 과거보다 불안정해졌다는 것은 높아진 이혼율로도 입증된다.요즘 젊은 부부 네 쌍중 한 쌍이 이혼한다고 한다.「두 집안의 결연」이라는 결혼관이 「남녀 한 쌍의 애정관계」차원으로 바뀌었기에 그만큼 결혼관계는 풀기가 쉬워졌다.
「결혼」이라는 정답만 유일하던 시대는 가고 「동거」「계약결혼」「독신」이라는 선택이 또다른 정답들로 자리잡았다.
가치는 다양해지고 선택의 가짓수는 늘어났다.선택의 자유가 주는 불안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취업」역시 마찬가지여서 고급실업이 늘었다는 것은 벌써 오래된 얘기다.
결혼은 선택이고 취업은 필수인 시대,직업관도 변했다.
그들은 생존보다 한 차원 높은 「삶의 질」을 찾으려하니 상대적으로 취업기회가 더 줄어든다.
삶의 질을 찾기에 만족스럽지 못하게 마련인 직장생활에 염증을느끼는 신세대는 「어떤 길이 더 좋은가」궁금해 역술에 의지하고자 한다.
사실 신세대들이 역학에 대해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대다수의 신세대는 「그냥 재미있어」본다고 한다.자신의 생각과 틀릴경우 굳이 점 쪽을 택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덜 합리적이고 더 운명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있는 부모세대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오히려 점 쪽을 택할 정도로 역학에 종속적인 경우가 많다.
이는 「합리적」「논리적」이라면서도 운명론을 믿는 신세대들의 무의식적 심리에는 심각한 구세대들로부터 내려온 문화적 유전인자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 통적으로도 한국인의 역학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수천년간 주역(周易)의 세계관,점복의 문화전통과 함께 살아왔기에일단 역학의 세계와 친근하다.
이는 역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리한 공자를 성인으로 받들어온조선왕조 5백년의 유교문화에 의해 더욱 강화됐다.
『역은 만사의 근본이며,선과 악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율곡의 주장은 우리 역사속의 역학관을 대표할 만하다.
그러나 역학에 관심있는 신세대들도 굿.무당으로 상장되는 무속적 점복에는 회의적이다.이는 또다른 차원의 신비주의로 받아들여진다.반면 역학은 「만물이 음양오행에 따라 움직인다」는 가설만받아들이면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상당히 논리적이 기에 상대적으로 「공부하고 싶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민중은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돼 있다』는 무라야마의 「식민통치 합리화용」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믿음이 신세대들의 무의식속에 숨어새로운 세기에도 살아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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