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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의 시네 알코올]변방 아일랜드의 자긍심과 단결의 상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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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아일랜드의 한 시골 해변 마을. 인구라고 해야 달랑 52명. 어린이 한 명에 젊은이 대여섯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노인이다. 대체로 중하층으로 보인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웨이킹 네드’(커크 존스 감독, 1998)는 코미디를 곁들인 잔잔한 드라마이지만, 그 안에 전복적 면모를 담고 있다. 서유럽에서 세계화의 변방처럼 보이는 아일랜드, 그곳에서도 변방인 외딴 시골 사람들이 그 고립성을 역이용해 주류 사회의 도덕과 가치를 조롱한다.

노인 재키는 이 마을에서 로또 복권 당첨자가 나왔다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 그럼 당첨 대상자는 자신과 부인을 빼고 50명 중의 하나다.
당첨자를 찾아내 개평을 얻을 생각으로 가장 친한 친구 마이클과 함께 탐문 조사에 나선다. 돼지를 키우는 젊은 친구 핀이 유력해 보인다. 마침 핀이 상담할 일이 있다며 재키를 찾아온다. 재키는 동네 펍에서 핀에게 술을 산다. 어떤 술? 여기가 어딘가.

아일랜드를 ‘기네스의 나라’라고 부르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까? 수년 전, 더블린에 출장 갔을 때 길 안내를 하던 아일랜드인 운전기사가 하던 말. “이 모퉁이에도 펍(술집), 저 모퉁이에도 펍, 여기에도 펍, 저기에도 펍, 온통 펍.” 아닌 게 아니라 더블린시의 길 모퉁이마다 펍이 있었고, 그곳에서 대다수가 마시는 맥주는 기네스였다.

기네스 맥주를 만드는 역사 249년의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과 직원들의 아파트가 모여 있는 ‘기네스 타운’은,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유적지에 버금가는 더블린의 관광 명소였다. 기네스는 아일랜드인들의 일상이 된 지 오래인 듯했다.
아일랜드는 체코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맥주를 많이 마시는 나라다.

250년 전에는 전혀 딴판이었다. 1750년대 아일랜드엔 소수의 군소 맥주 양조업자가 있을 뿐이었고, 대다수가 진이나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마침 영국에서 개발된 포터(흑맥주)가 수입돼 들어오면서 군소 맥주 양조업자들마저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아더 기네스(1725~1803)는 아버지가 대주교의 집사였는데, 대주교가 죽으면서 기네스 가족 각자에게 유산으로 100파운드씩 남겨 주었다. 아더 기네스는 이 돈으로 서른 살에 더블린 근교의 양조장을 사서 맥주 제조를 시작했고, 서른다섯에 더블린의 폐기된 양조장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를 매년 45파운드씩 9000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곳에서 영국 포터에 대항해 자기 식의 포터 ‘기네스’를 만들어 10년 뒤부터 영국으로 역수출하기 시작했다.
흑맥주가 ‘포터’로 불리게 된 건 이 술이 항만에서 일하는 영국의 짐꾼(포터)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1820년대부터 알코올 도수를 6~8도로 높인 흑맥주가 나오면서 여기에 ‘스타우트’라는 명칭이 붙기 시작했고, 마침 아일랜드를 평정하고 해외 곳곳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던 기네스 맥주가 1840년대에 ‘기네스 스타우트’라는 이름을 쓰면서 얼마 뒤부터 스타우트가 흑맥주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양조장은 1834년 아일랜드 최대의 양조장, 1914년에는 세계 최대의 양조장이 됐고, 정상에 올라선 기네스사는 1997년 그랜드메트로폴리탄과 합병해 ‘디아지오’라는 세계 최대의 주류회사로 올라섰다. 디아지오에 속한 브랜드는 기네스 맥주를 비롯해 위스키 ‘조니 워커’ ‘제이앤비’와 진 ‘탠커레이’, 보드카 ‘스미노프’, 데킬라 ‘호세쿠에르보’ 등 쟁쟁하기 그지없다.

영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유럽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이런 역사를 세운 기네스 맥주는 아일랜드인에게 자긍심과 연대, 나아가 단결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영화 ‘웨이킹 네드’로 돌아와 보면, 기네스의 그런 면모가 드러난다. 재키가 찾아낸 복권의 주인은 영화 제목에 쓰인 네드라는 노인이었다. 네드를 찾아갔을 때 혼자 살던 네드는 당첨 소식을 듣고 놀라 심장마비로 죽은 뒤였다. 복권을 손에 든 채로. 어쩔 것인가.

재키는 마을 사람 전원과 공모해 집단 사기극을 꾸민다. 더블린에서 온 복권사 직원에게 마이클을 네드라고 속여 돈을 타낸 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갖기로 한다. 그의 계획이 마을 회의에서 통과한 날, 마을 사람들이 동네 펍에 모여 결의를 다지듯 단체로 마시는 술 또한 기네스이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해도 되는 걸까. 어차피 네드는 죽었고 상속인도 없다. 관객들은 도덕적 부담 없이 마을 사람들 편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발 더 나간다.
보험사 직원이 찾아온 건, 공교롭게도 네드의 장례식장. 조문을 읽으려던 재키는 보험사 직원을 보고 즉석에서 죽은 이의 이름을 마이클로 바꿔 살아 있는 마이클 앞에서 조사를 창작한다.

“마이클, 자네가 내 위대한 친구라는 말을 전에 하지 못했네. 장례식에서 하는 말이라는 게 죽은 이에겐 항상 늦은 것이겠지. 자네가 이 장례식장에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어릴 때부터 함께 늙어 온 두 친구지만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있었을까. 재키의 말처럼 마이클은 졸지에 자기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들었으니, 그렇게 한번 친구의 정을 확인했으니 훌륭한 일이다. 그 조사 안에 이 마을 노인들의 소박한 삶과 인간관계가 농축돼 나타난다. 그 순간 이들이 당첨금을 나눠 갖는 행위는, 용서받을 만한 일에서 그렇게 해야 마땅한 일로 격상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복권 같은 자본주의의 규칙과 도덕에 대한 조롱으로 보일락 말락 함의를 넓힌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 LA 타임스의 7월 보도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 기네스 소비가 지난 7년간 계속 줄었고 2007년에 3.5% 성장으로 감소세를 살짝 면했다고 한다.
주택가격 하락과 실업률 상승 속에 값싼 동유럽 맥주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는 게 감소의 한 원인이란다. 신세대가 기네스를 낡은 것으로 여기면서 ‘버드와이저’를 마신다는 현지인들의 코멘트도 덧붙였다. 250년 전통이 너무 오래된 걸까, 아니면 세계화의 파도 앞에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게 없는 걸까.

기네스사의 소유권도 변해 1983년 위스키 회사 ‘디스틸러즈’ 인수 뒤 기네스 가문의 지분은 10% 이하로 떨어졌고 현재 이사진에 기네스 성을 가진 이가 하나도 없게 됐다.
어쨌건 아프리카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등지에서 기네스 맥주의 판매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기네스 배급은 지난해부터 디아지오코리아가 직접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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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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