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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전환 ④ 화려한 무대 떠나 30년 화가인생 일군 정미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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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중략)/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서글퍼라, 불운한 시대의 사랑이여. 어쩌자고 이들 연인은 저렇게 얽히었나. 일제강점기의 경성(서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는 이렇듯 테마곡 한 소절로 요약된다. 영화가 끝나고도 귀에 감길 듯 여운을 주는 노래. 그런데 이 곡, 경성시대 것이 아니다. 40대 이상이라면 한때 애창했을 1970년대 히트곡 ‘개여울’이 원곡이다. 30여 년이 흘렀어도 절절한 감성이 바래지 않는 ‘불후의 명곡’. 그 노래를 불렀던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정미조(58·수원대 미대 교수)씨를 만났다. “가수는 한때 달콤한 외도였다”고 회고하는 그는 이제 한국 화단이 주목하는 중견 화가로 맹활약 중이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나직한 목소리에 환한 미소를 띤 정씨가 인사한다. 16일 서울 홍릉 KAIST 갤러리. 스물세 번째 개인전을 여는 첫날이다. 북적대는 인파 속에서도 늘씬한 키가 눈에 띄었다. 세월을 비켜 간 듯 단아한 외모. 어깨에 드리운 흑백 스카프가 멋스러웠다. “제 화풍과 닮았죠? 실은 올봄에 제 그림을 모티프로 제작한 상품이에요.”

경영대학원 건물 2층 복도를 활용한 전시관에는 최근작 10여 점이 소개되고 있다. 흑백 평면 회화 일색인 ‘무제’ 시리즈다. 두터운 붓으로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커다란 점과 인간 형상을 엮어냈다. 한쪽 벽면엔 사방으로 뻗치는 나무를 표현한 120호짜리 작품이 걸려 있다. 담대한 기개와 율동감이 손에 잡힐 듯하다.

여느 전시회와 다름없는 풍경 속에서 정씨가 유난히 바빴던 건 전시회 책자에 사인을 요청하는 관람객이 많아서다. KAIST 경영공학 석사 2년차 이권탁씨도 그중 한 명. “영화 ‘모던보이’를 봤는데, 노래가 참 좋더라고요. 엄마가 그 가수가 유명했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 화가로서 전시회를 하시네요.” 수원대 미대 2학년 유석만씨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교수님 앨범을 다 갖고 있을 정도로 열성 팬이세요. 전 전혀 몰랐는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노래하는 걸 들으니 와, 잘하시던데요.”

화가로 전업한 지 어언 30년. 그래도 대중에겐 ‘가수 정미조’가 먼저다. 그만큼 잊지 못할 ‘시대의 연인’이었기 때문일 터다.

-아직도 가수 정미조를 그리워하는 분이 많죠.
“요즘도 ‘왜 TV에 안 나와요?’ 하고 묻는다니까요. 노래 그만둔 지가 30년인데. 유학하고 돌아와선 가수 꼬리표를 떼고 싶어서 무대에 일절 안 나갔어요. 화가로서 인정받고 싶어서요. 이젠 외국 아트페어에도 출품하고 작가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자부합니다. 강단에서도 18년째죠. 요즘은 학교 행사 같은 데서 곧잘 노래 불러요. 가수 경력을 지워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이젠 사람들이 그걸로 나를 좋아해 준다면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은퇴하셔서 더 아쉬워하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엔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어요. 그냥 만날 기숙사에서 통기타로 노래하다가 멋진 드레스 입고 훌륭한 밴드가 받쳐주는 가운데 신나게 노래하는 게 좋았죠. 원래 3년만 할 생각이었는데, 5년이 되고 7년 반이 흘렀죠. 그때 되니 ‘이제 노래는 원 없이 했다’ 싶더군요. 끼니도 못 챙길 정도로 빠듯한 일정에도 지쳤고요.”

가수로 떴지만 원래 꿈이 화가였다.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는데, 기숙사 신입생 환영회 때 한 곡조 뽑은 게 시쳇말로 난리가 났다. 학교 행사에 단골로 불려 다니게 됐다. 대강당에서 유명가수 초청 공연을 하던 날 학생 대표로 노래했는데, 끝나자 패티김이 무대 뒤로 불렀다. “너 노래 참 잘하더라, 내 쇼에 나올래?” ‘패티김 쇼’가 토요일 황금시간대를 주름잡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교칙상 방송엔 나갈 수 없었기에 기회는 무산됐다. 1972년 졸업과 동시에 TBC ‘쇼쇼쇼’에 출연한 게 데뷔 무대다.

“그 프로 하나 보고 서로 출연해 달라고 난리였어요. PD한테 커피 한 잔 안 샀는데도 앨범 13장이 줄줄이 히트했죠. 첫해에 신인가수상, 이후로 10대가수상을 휩쓸었어요.”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파도’ ‘불꽃’ 등으로 내리 사랑을 받았지만, 79년 은퇴하고 파리로 떠났다.

국립장식미술학교를 거쳐 파리 7대학 박사를 마치기까지 꼬박 13년. 김포 갑부의 딸이었음에도 집에선 한 푼도 지원받지 않았다. 가수 활동하면서 번 돈으로 물감 사고 밥해 먹었다. “자동차 한번 안 사고, 외식도 거의 안 했어요. 덕분에 밥도 못하던 애가 유학 끝날 때쯤엔 레스토랑 차릴 수준이 됐지요(웃음).”

86년 서울갤러리(프레스센터) 작품전에서 그는 ‘가수 정미조’를 기억하던 대중에게 강렬한 충격을 안겼다. 페인트붓을 거꾸로 세워 여인의 곡선과 어깨를 연상하게 한 도발적인 작품들을 선보인 것이다. 머나먼 이역 땅에서 도리어 ‘한국의 미’에 눈을 떠 탱화와 민화에 푹 빠졌고, 박사 논문도 ‘한국의 무신도’에 대해 썼다. 92년 귀국 후엔 점차 영적인 것으로 관심이 옮아가 먹 얼룩을 활용한 상징적 화풍으로 변모했고, 목조각·영상작업 등 작품세계를 계속 넓혔다. KAIST 갤러리의 개인전은 이렇듯 30년간 꾸준히 탐색해 온 예술세계가 총체적으로 집약된 결과다. 93년 사업가 남편과 늦깎이 결혼한 뒤 안팎으로 안정된 것도 큰 힘이다.

-영화 ‘모던보이’에 ‘개여울’이 나오는데, 알고 계셨나요?
“사실 오늘 알았어요. 아까 전시회에 온 분이 말해줬어요. 영화에선 누가 불렀어요? (김혜수가 불렀다는 말에) 그럼 그이가 심수봉·적우씨를 이어 리메이크한 거네. 실은 제가 처음 부른 것도 아니에요. 나중에 듣기를, 10여 년 전에 다른 가수가 불렀는데 전혀 반응을 못 얻었던 걸 이희목 작곡가가 저한테 어울리겠다며 준 거래요. 참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에서 녹음한 건데, 지금 들어도 노래는 잘했다고 생각해요.(웃음)”

-가수 컴백 생각은 없으신가요.
“전혀 없어요. 가끔 TV에서 출연 요청이 와 종합예술인으로서 면모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결국 가수 부분만 부각되고 끝나더군요. 그래도 음악은 늘 제게 영감을 주죠. 앞으론 무용·노래·그림을 만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런데 작품이란 게 되는 것 같다가도 다른 세계가 펼쳐져요. 그러다가 그림이란 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요. 뭐랄까, 가수는 제 인생의 달콤한 외도 같은 거였어요. 깨고 나서도 깨뜨리고 싶지 않은 꿈 같은….”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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