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상황, 10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심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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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03면

-8월에 ‘이명박 정부 6개월 경제 선방(善防)론’을 폈다가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 아직도 우리 경제에 문제 없다고 보나.

MB ‘정책 분신’ 박재완 수석의 진단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 대외여건이 10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안 좋은 건 사실이다. 그때는 그래도 우리하고 동남아 몇 나라만 안 좋았지 선진국과 세계시장은 괜찮았다. 우리만 달러가 부족했고 미국·일본은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가 동시에 다 안 좋다. 벌써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나라가 다섯 나라다. 앞으로 몇 나라가 더 IMF에 가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무역으로 먹고사는데, 물건을 팔 시장이 비틀거리고 외국인 투자 유치도 어려워지니 문제가 심각하다.”

-위기 국면임을 인정한다면 빨리 경제부총리제를 부활해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부총리가 있을 때 외환위기를 맞았고, 부총리 없이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부총리제는 개발경제 체제나 공산국가처럼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에서나 유효하다. 우리처럼 정부 부처가 10여 개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총리 따로, 부총리 따로 두는 것은 옥상옥일 뿐이다. 더구나 지금 기획재정부 장관은 참여정부의 경제부총리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예산권도 있고 경제정책 총괄권도 있다.”

-그래도 국제금융과 국내금융을 재정부와 금융위로 나누면서 손발이 안 맞는다는 지적이 많다.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우리가 외환위기 때 얻은 교훈이 재정과 금융을 분리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공룡 부서인 재정경제원이 견제받지 않아 외환위기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지 않았나. 그래서 새 정부 들어 정부조직 개편 때도 재정부와 금융위를 분리한 것이다. 단 국제금융은 국고와 관련이 깊고 거시정책의 일환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재정부에 두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고, 이번 사태로 인해 그 생각이 맞았음이 증명됐다. 자꾸 경제팀 호흡 문제를 얘기하는데, 역할이 서로 다른 부처에 완벽한 의견일치를 주문하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렇다 해도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현 경제팀은 교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처럼 우리보다 앞서 위기를 겪은 나라들에서 경제팀 바꿨다는 얘기를 못 들어봤다. 그런 식이라면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벌써 몇 번은 바꿔야 했다. 자꾸 부총리제 만들라, 사람 바꾸라 하는 건 본질이 아니다. ‘누구는 말실수가 잦고, 누구는 민간인 출신이라 존재감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들 많이 하는데, 불 끄려고 호스 들고 있는 소방수한테 뒤통수 못생겼다고 자꾸 그러면 힘이 나겠나.”

“미국도 경제팀 안 바꿨다”

-한국은행이 초기에 좀 더 선제적으로 나갔으면 환율이 이 지경까지 됐겠나.

“지난 일에 자꾸 가정을 해서 얘기하는데…. 오늘(23일) 한은이 과감한 대책을 내놨는데 시장 반응이 어땠나(이날도 주가와 환율이 요동쳤다).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은에 대해 자꾸 말들이 많은데 그곳은 속성상 통화가치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곳이다. 보수적 성향인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웃 나라 일본은 괜찮은데 우리 외환시장은 심하게 흔들린다. 은행은 또 정부에 손을 벌리고 있다. 도대체 외환위기에서 우리는 뭘 배운 것인가.

“외환위기 이후 살을 깎는 구조조정을 했다. 대기업 부채비율이 3분의 1 이하로 낮아졌고 금융기관의 건전성도 많이 좋아졌다. 외환보유액도 엄청 늘었다. 하지만 별 진전이 없거나 오히려 거꾸로 간 분야도 많다. 정부의 지나친 규제, 느슨한 법질서, 노동시장 경직성, 에너지 다소비, 과도한 대외 의존도와 취약한 내수 기반 등이다. 정부와 공공부문 구조조정도 지난 5년간 뒷걸음쳤다. 지금 개혁을 밀고 나가야 하는 이유다.”

이 대목에서 미국 하버드대에서 재정학을 전공한 그에게 재정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적 감세안을 발표한 정부가 한편으로 재정지출을 확대하겠다는 건 모순 아닌가.

“지난 10년간 재정 건전성이 나빠지는 속도가 빨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선진국에 비해 재정 여력이 있는 게 우리의 최대 강점이다. 더구나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IMF의 공식 권고 사항이다. 재정 지출을 무리하게 확 늘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지금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을 재정충격지수로 보면 약간 긴축적이다. 이 때문에 국회 심의 과정에서 세출을 좀 늘려도 경기 중립적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감세를 한다면 고소득층과 법인이 혜택을 보는 소득세·법인세보다 서민이 혜택을 보는 부가가치세를 우선 내려야 한다는 게 야당 주장이다.

“부가세는 우리나라 조세 중 가장 바람직하게 정착된 세금이다. 세계적 성공 사례다. 1970년대 말 도입한 이 세금을 세계 각국에서 배우러 온다. 조세 원칙을 생각해 보라. 넓은 세원에 부담이 되지 않는 낮은 세율로 부과하는 게 최선이다. 그 반대로 세원 폭이 좁고 두텁게 부과하는 것이 최악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10% 부가세고,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 종부세다. 세입 구조상 비중이 큰 부가세를 내리면 어디선가는 벌충해야 한다. 그럴 때 바로 ‘폭이 좁고 두꺼운’ 엉뚱한 세금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부가세는 절대 손대서는 안 된다.”

“위기일수록 멀리 봐야”

이쯤 해서 최근 박 수석의 주도로 발표된 100대 국정과제에 대해 물었다.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이런 위기 국면에 백화점식으로 국정과제를 나열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멀리 볼 필요도 있다. 우리 부모들은 전쟁이 나도 임시 천막을 쳐놓고 공부를 시켰다. 어린 시절에도 물난리가 났지만 학교는 갔던 기억이 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격변기를 거치면 반드시 국력의 순위가 재편된다. 94년 부동의 1위였던 일본의 국가 경쟁력 순위가 올해 22위다. 지금 어디어디에 구멍이 뚫렸다고 그거 막는 일만 해 가지고는 2∼3년 뒤 확 뒤처진다. 경제 시스템의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게 절실한 과제다. 위기일수록 체질을 튼튼히 해야 한다.”

-산업은행 민영화는 예정대로 가는 건가.

“당연하다. 지금 월가에서 지나치게 위험을 추구하는 파생금융상품과 감독 당국의 부실이 문제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우리처럼 위험 자체를 회피하는 낡은 전당포식 금융을 계속해선 안 된다. 선진국보다 한참 뒤져 있는 우리가 더 뒤로 가자고 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말라’는 얘기와 같다.”

-공무원 생활을 감사원에서 시작했는데 최근 직불금 파문은 어떻게 보는지.

“‘감사를 해보니 이런 문제가 있더라’고 감사원이 대통령에게 사후 보고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감사 도중에는 감사의 독립성이 유지돼야 한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지적했듯 직불금의 경우엔 감사를 마치기도 전에 대통령에게 보고한 게 문제다.”

-감사원의 중립성을 위해 대통령 직속에서 국회로 이관하자는 주장이 많은데.

“학자 때부터 나도 그 방안을 찬성해 왔다. 감사원의 권한은 직무감찰과 회계검사 두 축이다. 직무감찰은 행정부 고유 권한이므로 행정부에 그대로 두는 게 맞다. 하지만 회계검사는 선진국처럼 국회로 옮겨 예산결산 심의를 보좌하는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 그 대신 현재 국회 국정감사 제도는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앞으로 개헌 논의가 있다면 이 문제도 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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