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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돈] 3. 미술 : 그들만의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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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 알맞은 미술품값 결정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손꼽는 것은 경매다. ㈜서울옥션이 지난달 29일 실시한 제86회 정기경매에서 박수근의 작품이 응찰을 받고 있다.

'미술(美術)산업'이란 표현은 낯설다. 아름다운 미술에 감히 '산업'을 붙이기 어려워서일까. 대신 미술시장이란 말은 있다. 상품(미술품)을 만들고 팔고 사는 사람과 장터는 있으나 생산.유통.소비 과정을 합리적인 경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십년 넘게 불황이라는 한국 미술시장은 국세청조차 매출 규모나 마진율 등 정확한 속사정을 모른다고 한다.

지난 5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파블로 피카소의 1905년 작 '파이프를 든 소년'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200억원에 낙찰됐다. 문화관광부가 2002년도에 펴낸 '문화산업백서'를 보면 연간 국내 미술품 거래 규모는 어림잡아 3500억원. 그것도 각각 1000억원대인 고미술품.모조미술품.현대미술품에 환경조형물 시장 500억원을 더한 수치니 한해에 우리나라에서 거래되는 현대미술품 총액이 피카소 그림 한점 값에 못 미친다는 얘기가 된다.

"미술은 무한한 화폐의 흐름"이라고 했던 '비즈니스의 귀재' 피카소를 따라갈 수야 없지만 눈 높은 부자들의 지갑을 여는 데 그다지 재주가 없는 국내 작가들로서는 한숨이 나올 법하다. 피카소 같은 거장 몇몇을 빼고는 어느 시대에나 미술가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되새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화가 유양옥(60)씨는 2년 전 개인전을 열면서 화랑 들머리에 "누구나 들어와 구경하고 값을 물으세요"라고 아예 써 붙였다. 그림 값이 비싸리라고 지레 겁을 먹은 일반인을 위한 배려였다. 한푼 두푼 모아 집에 걸 그림 한점을 진심으로 원하는 미술 애호가들에게 화랑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놓은 민화풍 그림은 한점에 평균 100만원 안팎의 값을 매겨 출품작의 90%가 팔려나갔다. 한때 화상으로 일했던 유씨는 "한국 미술시장이 살아나려면 화랑과 소수의 작가와 컬렉터들이 담합하듯 올려놓은 미술품 값을 적절하게 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술평론가인 박영택(경기대 교수)씨는 미술시장 불황의 가장 큰 원인을 두 가지로 꼽는다. 80년대 이후 투자 가치에만 집중한 수집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어 단기 차익을 노린 반짝 특수가 이어지면서 진짜 애호가들의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격 내리기 등의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매 전문가인 김순응(서울옥션 대표)씨는 "우리 미술시장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림값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하는 경제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물림으로 평생을 서울 인사동에서 화상으로 일해온 노승진(노화랑 대표)씨는 "한국 미술시장은 중동건설 붐에 이은 아파트 대규모 건설이 진행된 1970년대 후반과 88년 서울올림픽 뒤 3~4년, 단 두번의 반짝 호경기 이외에는 늘 침체와 불황의 긴 늪에 빠져 있다"고 돌아본다. 호황 때 한번 올라간 거품이 빠지지 않은 데다 "누구는 얼마 받는데 나도 그렇게 받아야지" 하는 작가들의 논리가 주먹구구식으로 먹혔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한 작가의 작품 값이 화랑, 경매장, 작가의 작업실에서 각각 다른 이중가격제는 한국 미술시장이 불투명하다는 불신을 낳았다.

현재 한국 미술시장은 한마디로 빈익빈 부익부로 흐르고 있다. '빅 3'로 꼽히는 박수근.이중섭.김환기는 찾는 사람은 많지만 작품을 못 구할 지경인 반면 중견과 신인 작가들은 거래가 뚝 끊겨 중저가품이 발 붙일 곳이 없다. 윤태건(카이스갤러리 디렉터)씨는 "최근 들어 자신의 안목과 취향을 따라 이름 없는 작가나 중저가 작품을 소신껏 수집하는 소장가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던 작가나 안전한 기성작가에게만 매달려온 화랑이나 사모은 작품 값 올리기에 치중했던 기존 컬렉터 모두 그 '안이한 낙원'을 떠나야만 한국 미술시장도 살아난다.

정재숙 기자

*** 美大 가기 위한 돈은 얼마…고 1에 '붓' 들면 3000만원쯤 들어

서울대박물관장을 지낸 화가 일랑(一浪) 이종상(66)씨는 미술가로 나서는 이들을 '굶주릴 각오로 붓을 든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처음부터 경제적 혜택에서 한발 뒤쪽에 서 있는 직업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일랑은 설명한다. 그럼에도 '굶주림의 미학'을 기꺼이 고른 이들에게 들어가는 밑천은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 미술가 지망생이 정식 교육을 받고 작가로 설 기초를 닦기까지 드는 돈은 얼마일까. 그 밑천을 셈한 꽤 현실적인 자료가 나왔다.

홍익대 미대 예술학과가 지난달 9일 펴낸 잡지 '예술지상' 제27호는 미대 지망생이 져야 할 경제적 부담을 한 입시생을 예로 들어 계산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이른바 '입시미술'을 시작해 방과 후 학과학원과 미술학원을 다닐 경우 모두 3000만원쯤 든다고 이 잡지는 소개했다. 물론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다.

3000만원의 내역을 보면 ▶고1 겨울방학과 고2 여름방학 넉달, 매달 50만원씩 200만원 ▶고2 3~6월, 9~12월 여덟달, 35만원씩 280만원 ▶고2 겨울방학 두달, 60만원씩 120만원 ▶고3 3~6월, 9월, 40만원씩 200만원 ▶고3 여름방학 두달, 70만원씩 140만원 ▶고3 입시특강(11월 초~1월 중순) 400만원 ▶학과학원 과외 1,2 학년 기본 40만원씩 24개월 960만원 ▶3학년 기본 50만원씩 10개월 500만원 ▶학교 납입금 1년에 약 80만원 가정해 3년에 240만원이다.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드는 재료비.식비.용돈 등은 더하지 않았다. 여기에 특별 보충과외를 한다면…. 계산기가 고장난다. 한국에서 미술품 값이 특별히 비싸야 할 몇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까. 미대 입시를 개선하는 것도 미술시장 발전과 관계있다는 한 보고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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