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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이 펜타곤 가서 계약 따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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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60년대의 한국-. 그것을 극명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저울대는 없다. 그러나 단적으로 무게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다.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왼쪽)이 월남에 파병된 맹호부대를 방문해 유병현 사단장으로부터 부대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65년 10월부터 본격화되는 청룡과 맹호의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되면서 마땅한 세계 수출시장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그나마 믿는 시장은 월남이었고, 66년 국가의 수출 총 목표액으로 잡은 것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이 목표액을 달성해보려고 정부는 강력한 ‘수출진흥정책’을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2억5000만 달러를 벌기 위해 정부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지금은 웬만한 중소기업 하나만 해도 2억5000만 달러 수출을 하지만 그런 정도가 60년대 한국의 경제 체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진의 월남 진출 계획은 성사만 된다면 더없는 기회였다. 이미 조중훈 회장(당시 사장)의 눈에는 황금을 캘 수 있는 광맥이 월남에 있다는 것이 보였다니까 일찌감치 혜안을 가진 셈이었다. 조 회장은 채명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맹호사단이 전부 천막에서 지내고 있더라면서 회고를 계속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다가 도착해서 다시 퀴논 항에 가보니까 부대로 수송이 안 된 짐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어요.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니 미군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게 전부 전쟁물자인데. 장병들에게 지급할 보급품도 전쟁물자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첫눈에 이건 금광이다, 그래가지고 귀국 후에 정부에도 얘기하고 동생(조중건)을 보내고 그랬지요.”

-월남을 방문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파병을 한다고 난리를 칠 때지요. 내 입장에서는 가기만 하면 뭘 합니까. 실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사업 차원에서. 근데, 전쟁하고 수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어야지. 파병은 하는데 전쟁이 어떻게, 언제까지 갈 건지 그런 정보를 알아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월남을 가기 전에 먼저 미국을 갔어. 그때가 65년 8월이에요. 내가 57년부터 미군 수송을 했거든? 말하자면 한국에서 개척을 한 거지요. 미군 수송을 한국 업자가 맡은 것은 우리가 최초니까. 그러니 수송 장교들, 고급장교들 다 알기 때문에 미국 펜타곤(미 국방부 본부건물)을 두드렸어요. 아니나 달라, 전부 아는 얼굴들이야.”

“57년 벤츠 타며 미군들 기죽여”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와 사귀셨습니까.
“껄껄. 내가 어째서 고급장교들을 많이 알게 됐느냐, 우리가 수송을 하면서 미군을 접촉할 때만 해도 미군 장교들이 한국 사람을 생각할 때 남자는 전부 도둑놈이고 여자는 ‘양갈보’ ‘양부인’이고, 집은 ‘하꼬방’이라는 시각으로 봤어요. 50년대 초기에는 다 그랬습니다. 미군과 얘기를 해보면 그때는 한국 사업가들이 지프를 타면 최고였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저것도 도둑질한 지프 타고 다닌다 이거예요. 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 사람들 선입관이 그랬어요. 불쾌하지. 그래서 나는 57년에 벤츠를 타고 다닌 거예요. 심리적으로 미군들 사고방식을 눌러가면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나를 다시 보는 거야. 그때부터 백만장자가 아니더라도 백만장자의 매너를 가져야 되겠다 하는 게 내 사고방식이 됐어요. 왜, 미국이 알다시피 자본주의 국가인데 백만장자라면 우러러보거든. 집에 와서 봤을 때도 돌멩이로 근사하게 꾸며놓고 정원이 넓고 하면 할리우드 배우 집은 아니지만 꺼벅 죽거든, 껄껄껄. 8군 장교니 뭐니 내가 대접도 받아봤지만 집으로 초대도 많이 했어요. 대접을 받으면 해야 되잖아요. 특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장교들, 일이 끝나고 본부로 귀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초청했어요. 그러면서 임무 끝나고 가니까 네 와이프한테 주라고 선물도 꼭 했고. 그렇게 10여 년 가까이 한 5000명을 초대했지요. 그러니 친구가 많을 수밖에. 펜타곤에 가보니까 수송 장교들은 전부 반갑게 환호하고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묻고 전부 우리 편이야, 껄껄껄.”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특히 미군의 파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구조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미국 경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돼있던 것이 당시 한국의 경제 형편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는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행보를 하기는 어렵게 돼 있다.

무역적자와 흑자의 향방이 달러 가치와 원유가, 미국의 성장률, 그리고 미국 산업의 경쟁력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 있으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월남이 미국에 의존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구나 미국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의 수송업자로서는 월남에 진출할 수 있는 지렛대를 펜타곤에서 얻게 된다면 여간 큰 후원 세력을 등에 업는 게 아닌 셈이었다.

조 회장은 펜타곤에서 지원 약속을 받으면 무리하지 않고도 시동을 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덩치가 큰 만큼 추진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었고 정부 협조 없이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조 회장은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털어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한진이 정부 특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수출진흥에 정부가 총력을 쏟은 그때는 그런 큰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업체가 한진 외에는 없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외화벌이의 첨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장교들을 펜타곤에서 만났을 때 월남에서도 한진의 역할이 있다는 걸 인식시켰습니까?
“당연히 얘기를 했지요. 정보를 얻겠다고 갔지만 한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 대부분이 수송 담당 고급장교들이고, 그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내가 얘기를 안 해도 왜 왔는지 알았을 거예요. 그만큼 친하게 지냈고. 미군이 그때 한 200만인데 고급 수송 장교라는 건 국한되어 있잖아요. 진급을 했어도 병과를 바꾸지 않으니까 여전히 수송 담당이고. 그러니 다 알지. 그래서 내가 한국군이 파병 가는데 우리가 수송을 하고 싶다. 우리한테 용역을 줄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슈어(Sure)’ 하면서 아주 쉽게 대답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직접 월남을 둘러보러 간 거예요.”

월남전 당시 사이공 시내 모습.

물론 한진에 관한 자료는 예상 외로 미국 펜타곤 서류함에 가득 보관되어 있더라고 했다. 한국에서 미 군수물자들을 수송할 때 무엇을 했고, 어떻게, 얼마에 했다는 것까지 전부 파일로 보관해 뒀더라는 것이다. 미국이 신뢰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이 원하면 수송하는 일감을 주겠다, 계약을 해주겠다. 다만 주는데 조건이 있다. 월남에 장비를 가져오너라. 그걸 약속하는 의미로 300만 달러를 걸고 계약을 하자. 이게 핵심입니다. 첫 방문에서 아주 쉽게 약속을 받고 곧바로 계약을 했지요. 300만 달러는 위약금으로 걸어놓는 돈이지만 조건의 핵심이 장비이기 때문에 좋은 장비를 그만큼 가져오라는 얘기고, 그렇게 하면 물량을 주겠다는 얘기예요. 그 당시 300만 달러면 대단한 금액입니다. 그렇지만 수송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나갈 노동력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는 모두가 근면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300만 달러로 시장을 열 수 있다면 큰돈도 아니고 분명히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지요. 더구나 버리는 돈도 아니고 장비 구입인데. 일단 귀국해서 펜타곤에서 있었던 일을 정부에 보고했어요. 이런 일이 있으니까 우선 정부에서 월남 정부의 양해를 좀 구해주시오. 그게 우리 땅이 아니잖아요. 점령지도 아니고. 그러니 우리 근로자들과 장비가 들어간다고 월남 정부의 양해를 구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뭐 그렇게 해서 시작을 한 겁니다.”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시니까 쉽게 된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국내에서 특혜 문제는 왜 나온 겁니까?
“껄껄. 정부 보증 때문이지요. 그땐 특혜가 될 수도 없는데 정부가 한진 문제로 긴급회의도 하고 그러니까 업계에서 누가 특혜 얘기를 좀 했어요. 하여간 300만 달러가 적습니까? 우린 그런 돈이 없었어요. 그걸 정부가 보증해 달라는 거지요. 솔직히 정부가 보증을 해주지 않으면 한진이 주저앉게 되는 그런 계약을 했어요. 배짱도 컸지, 껄껄껄. 그 얘기를 하자면, 장기영씨, 그분이 그때 부총리 아닙니까.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장기영 부총리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겁니다. 하여간 그분에게 보증 얘기를 했더니 너무 놀랐는지 처음엔 눈만 껌벅거리고 말이 없어요, 껄껄껄. 그러더니 딱 한마디야. 각하밖에 못해요, 이러잖아요.”

-어떤 내용으로 계약을 했는데 정부 보증이 필요했습니까?
“일감을 주는데 장비를 가져오라는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일은 1966년 5월 15일 이후부터 하기로 하고 300만 달러를 걸고 쌍방계약을 하자, 장비를 못 가져 와서 일을 못하면 한진이 300만 달러를 위약금으로 물고, 만약에 미국 측에서 작전상 필요 없어서 계약을 취소하면 300만 달러를 한진이 받기로 그런 계약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따리 장사는 안 되고 제대로 된 장비를 가지고 들어와라, 그거거든? 그러니 일감은 확실하게 확보를 해주는 반면 우리도 확실한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서 전쟁물자를 작전에 차질이 없도록 신속히 수송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쌍방계약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꼼짝 못하는 거지요 서로가. 그런데 돈이 있나. 장비를 구입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실은 그 계약서를 가지고 귀국길에 홍콩에 있는 미국 은행부터 찾아갔어요. 융자를 받으려고. 거기서 계약서를 쭉 보더니 좋은 계약이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300만 달러 융자를 해줄 용의가 있는데 단, 한국 정부의 개런티를 받아와라, 담보도 없이 돈을 그냥 줄 수는 없으니 정부 보증서를 가져오라 이거지요. 말은 맞지. 그렇지만 우리 정부가 그 당시에 상당히 어려웠잖아요.

일요일 한국은행서 긴급 이사회

그렇기 때문에 장기영씨도 해줄 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계약은 해왔지만 계약서에 사인한 것밖에 더 있어요? 그땐 솔직히 전쟁터에서 어떻게 될지 내일을 모르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습니까.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자유중국(대만)을 방문하셨던가? 그랬는데 만나 뵙고 여차여차해서 수송시장을 뚫었지만 정부 보증이 없으면 결국 계약도 파기되고 월남에 나가서 일도 못하게 된다고 부탁을 드렸어요. 1965년에 한일국교가 됐지요? 그때 정부의 가용외화가 얼마냐 하면 4700만 달러밖에 없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쓸 수 있는 달러가 그 정도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그 숫자를 내가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도 난감하시지.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가서 용감스럽게 해라.’ 껄껄껄. 해주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용감스럽게 하래요. 박 대통령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분입니다. 결국은 해주겠다는 말씀인데 부총리도 있고 정부 보증은 절차가 있으니까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장기영 부총리로서는 대통령의 언질이 있었으니까 동력이 붙었겠군요.
“장기영씨한테 얘길했더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좋아서 신이 났어요. 그런데 대통령을 만나느라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계약한 날짜는 촉박하고 아주 급하게 됐어요. 언제 어느 날까지 장비를 넣기로 했는데 날짜를 못 지키면 계약상 7만 달러가 달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다고 했더니 나중에 재무장관을 했지만 황종률씨가 그때 재무차관인가 그랬는데, 일요일에 한국은행에서 이사회를 열었어요. 일요일에 이사회 열었다는 얘기 들어봤어요? 처음 듣죠? 전무후무한 얘기일 거야, 껄껄껄. 그것 때문에 내가 황종률씨한테 굉장히 싫은 얘기 들었다고. 중앙은행을 어떻게 보고 일요일에 긴급 이사회를 열게끔 했느냐고 말이지. 하여간 그렇게 한 덕분에 한국은행에서 개런티를 해준 걸로 융자 받고 장비 실어내 가면서 월남으로 나가게 된 거지요. 그때부터 5년 반 동안 우리 한진그룹이 정말 열심히 해서 엄청난 외화로 국가경제를 도운 겁니다. 껄껄껄.”<계속>

이호 객원기자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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