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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점점 모질어지는 우리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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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잡담하는 자리에서 가끔 지역별 특성에 관한 우스갯소리를 듣곤 한다. 일부를 지면에 소개한다. 충청도 얘기다.

1919년의 3·1운동 당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충청도 출신이 유독 많았다. 게다가 아우내 장터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를 비롯, 타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충청도 인사들이 만세운동을 벌이다 희생당했다. 이유는? 충청도가 워낙 느려서 그랬다는 것이다.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도 모르고 있었단다. 9년이나 흘러서야 뒤늦게 알고 “뭐여!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집어먹었단 말여?”라며 격분해서 너도나도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얘기다.

웅숭깊고 감정을 경솔하게 드러내지 않는 충청도 기질을 표현하는 농담도 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아무리 우스운 얘기를 해도 충청도 신자들은 절대 웃지 않는다. 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웃는다”는 것이다. 겉보기에 무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단호하고 급한 기질이 있다는 비유도 있다. “보신탕 들 줄 아십니까”라고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개 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저 건너 콩깍지는 깐 콩깍지냐, 안 깐 콩깍지냐’는 발음 테스트를 충청도 사람에게 시키면 길게 갈 것 없이 “깐 겨, 안 깐 겨”라고 말해 버린다는 것이다.

 압권은 에두르는 언어 구사법이다. 영악한 서울 사람이 충청도 장터를 찾았다. 한 아주머니가 수박을 팔고 있었다. 서울 사람이 “한 통에 얼마냐”고 물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오천원? 만원?”이라고 재차 물어도 대답이 없자 더 깎을 수 있겠다 싶어 “오천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더란다. “냅둬유. 이따가 우리 집 개나 주게유.”

객쩍은 데다 특정 지역에 결례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굳이 소개한 것은, 요즘 들어 은근한 ‘충청도식’ 화법이 부쩍 아쉬워진 탓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들이 너무 독하고 모질어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염치와 예의, 배려와 금도(襟度), 나아가 품위와 전아(典雅)함까지 갖춘 발언이나 글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걱정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말본새가 원래부터 모질고 표독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나를 포함해 글을 다루는 기자들의 책임도 클 것이다. 한글날인 어제도 매스컴의 잘못된 국어 사용 실태에 대한 보고서들이 나왔다. 문인도 예외가 아니다. 중견 작가 정모씨의 작품 한 대목은 참 기가 막힌다.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간 부티크 안에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 고급한 삶을 물질로 구현해 놓은 듯한 여름용 의상의 섬세한 패브릭을 쓰다듬다 보면,(중략) 블랙 레이스와 시폰이 펼치는 빅토리아풍의 원피스는 가까이 다가서는 어떤 수컷도 쓰러뜨릴 수 있는 지독한 페로몬을 내뿜고 있다.’(권오운 『작가들이 결딴낸 우리말』에서 재인용)

 그러나 내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점점 모질어지는 말 쓰임새다. 전교조의 ‘미친 교육’이라는 구호가 과연 ‘교육적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정상적인 교사라면 생각이 다르다고 대뜸 ‘미친’이라는 극한 용어를, 그것도 학생들 앞에서 쓸 수 있을까. 어제 출범한 보수단체의 명칭 ‘반국가교육 척결 국민연합’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척결(剔抉)’은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낸다’는 뜻이다. 당사자들은 비유적으로 쓴 단어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비유보다 적개심이 더 또렷이 감지된다. 비겁하고 때로 사악하기까지 한 인터넷 댓글들은 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독한 항생제를 자꾸 주사하면 박테리아(세균)의 내성(耐性)이 강해져 마침내 퇴치 불가능한 수퍼 바이러스가 탄생한다. 남에게 상처 주는 데 급급해 독한 말만 골라 쓰다 보면 우리말 본래의 은근한 맛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나중엔 전투용 언어와 상거래용 언어만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말이 더 이상 모질어져선 안 된다. 은근함을, 품위를 되찾아야 한다. 말은 결국 심성(心性)에서 나온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