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위기에도 힘 못쓰는 유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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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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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화 출범을 하루 앞둔 1998년 12월 31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유로화는 21세기를 향한 유럽의 열쇠”라고 말했다. 유럽 각국은 내심 유로가 달러를 제치고 세계 통화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 유로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1유로는 1.18달러에 역사적인 거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출범 6개월 만에 유로화 가치는 13% 떨어졌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위기가 닥치자 국제 금융시장은 유로를 버리고 달러를 집어 들었다.

#장면 2.

2008년 9월 15일 세계적 투자은행(IB)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달러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분석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급격히 줄이는 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금융의 중심이 유럽으로 옮겨갈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유로화 가치도 함께 올랐다. 그러나 채 한 달이 못 돼 유로화 가치는 1.3달러대로 곤두박질쳤다. 유럽도 금융 불안에서 예외가 아니고, 유럽의 경기 침체가 본격화될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다.

유로의 꿈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사람들이 다시 달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불을 지른 것은 미국인데, 그래도 믿을 것은 달러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두 달 전 1.6달러 목전까지 갔던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는 6일 1.36달러로 급락했다. 유로가 주저앉자 10년 불황을 이겨낸 일본 엔화가 재빨리 빈 자리를 차지했다.

◆유로의 역설=유로의 힘은 15개국이 같은 돈을 쓴다는 데서 나온다. 덩치(경제 규모)가 작아서는 세계 중심 통화 자리를 넘보기 어렵다. 유로존의 국내총생산은 12조9000억 달러로 미국(13조8000억 달러)에 맞먹는다. 지난해부터 미국 경제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자 각국 중앙은행은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은 줄이고 유로 비중(지난해 3분기 26%)을 늘렸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 불안이 유럽으로 확산하고, 유럽 경제 침체가 가시화되면서 유로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졌다. ‘15개국 단일 통화’는 곧 유로의 약점이 됐다. 유럽 국가들은 머리를 맞댔지만 미국의 구제금융처럼 확실한 대책을 내지 못했다. 나라마다 사정이 제각각이어서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 중앙은행 총재는 “우리는 미국처럼 연방 재정이 없다”고 말했다.

◆달러의 역설=지난해부터 달러는 수난을 겪었다. 브라질 출신의 수퍼모델 지젤 번천은 광고 개런티를 달러 대신 유로로 받았다. 번천의 매니저는 “달러화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던 IB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달러는 말 그대로 찬밥 신세가 됐다. 그러나 불안이 증폭되자 오히려 달러 가치가 올랐다. 유로 대비 달러 가치는 미국 하원이 구제금융법안을 부결한 무렵부터 가파르게 올랐다. 13개월래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뉴욕 타임스는 “달러 강세는 최상의 선택이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미덥지 않기는 달러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현재 상황에선 대안이 없다는 의미다. 다만 달러는 엔화 대비 약세다. 지난해 중반 120엔을 줘야 1달러를 살 수 있었는데 최근 ‘100엔=1달러’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일본이 금융 불안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엔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제일 센 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계 경제가 허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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