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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2. 현인과 고복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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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육군본부는 서울 을지로1가에 있었고, 우리 장교 후보생들은 명동성당 뒷마당에서 약식 훈련을 받았다. 1950년 10월 하순, 평양 포로수용소에 심문관으로 가기 위해 트럭을 타고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방향이 바뀌어 미군이 인천 송도 소년형무소 자리에 설치한 포로수용소로 갔다. 이미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이 후퇴를 계속하고, 평양이 함락되기 직전이라고 했다. 가서 보니 땅바닥에서 뒹굴며 자는 중공군 포로도 있었다. 우리는 포로들에게 지문을 찍게 하고, 기초 심문조서를 꾸미는 일을 했다.

그해 11월 중순 육군본부로 귀환했다. 부대 배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국군의 후퇴가 너무 빨랐다. 12월 21일, 비상이 걸려 잠에서 깼다. 다음날인 22일 오후 9시까지 청량리역에 집결하라는 것이다. 이동수단도 없어 각자 알아서 가야 했다. 이미 중공군은 동두천께 와 있었다.

이때 친하게 지내던 현 중위가 나에게 사정을 했다. 주번사령이었던 그는 “우리 형이 가수 현인(‘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했다)인데 청진동 집에 가서 밤 9시까지 청량리역으로 나오라고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주번사령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서울도 함락 직전이라 어수선했고, 가끔 총소리도 들렸다. 나도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하니 제발 살려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오후 4시쯤 청진동 집에 찾아갔더니 현인씨는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 빨리 청량리역으로 나오라고 전했는데 역에는 혼자 나왔다. 쌀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쌀가마니 위에서 파카를 뒤집어쓰고 떨고 있었는데 현인씨는 중령 옆에서 난롯불을 쬐며 특별대우를 받았다.

학생장교 중에 고려대 호국단장이 있었다. 그가 현인씨에게 ‘신라의 달밤’을 불러달라고 했다. 현인씨는 “나라가 위급한 때니 지금은 사양하겠다. 나중에 세상이 좋아지면 부르겠다”고 했다. 그 후 나는 20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현인씨를 만났다.

51년 1월, 충북 진천에 있는 6사단 사령부로 배치됐다. 2월 어느 날 군예대에 있는 키 큰 가수가 나를 찾아왔다. 고복수씨였다. ‘타향살이’ ‘짝사랑’ 등으로 유명한 가수였는데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군예대에서 활동했다. 이때는 미국 고문관의 허가 없이는 전방통제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 집에 가야겠는데 고문관에게 부탁해 허가서를 얻어달라고 요청했다. 부탁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 간곡하고 절박했다. 생각하다 못해 사병에게 행정과에 가서 타자기를 빌려오라고 했다. 내가 직접 영문을 쳐 허가서를 만들고 미국 고문관 사인도 해서 줬다. 고복수씨와는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6사단이 화천에 있을 때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나는 연락장교를 계속하기가 싫어 부산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4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이때 같은 내무반에 이병문 대위가 있었는데 나중에 해병대 사령관까지 됐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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