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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속 발레는 각선미의 전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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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1848년 5월 ‘드레스덴 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하지만 혁명은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군의 개입으로 금방 진압되고 말았다.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중이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마침내 파리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주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 폴린 드 메테르니히의 도움을 받아 나폴레옹 3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1861년 독일에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연주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지만, 바그너는 파리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자리를 잡고 싶어했다. 19세기 유럽 오페라의 메카는 프랑스 파리였다.

파리 오페라 극장장은 오페라 ‘탄호이저’의 상연을 앞두고 바그너를 만나 발레 얘기부터 꺼냈다. 제2막에 발레 장면을 반드시 넣어야 흥행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바그너가 ‘19세기의 문화적 퇴폐주의’라는 에세이에서 후일담으로 남긴 내용이다. 사실 당시 파리 오페라에선 4~5막짜리 오페라에서는 적어도 한 막, 주로 2막에 발레 장면이 삽입됐다. 대본 작가는 처음부터 발레 장면이 자연스럽게 줄거리에 녹아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가사도 프랑스어로 바꿔 불러야 했다. 바그너는 처음엔 주저했으나 파리에서 작곡가로 성공하기 위해 극장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84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탄호이저’에 바쿠스 춤을 삽입한 것이다. 하지만 질펀한 춤이 벌어지는 비너스 동산 장면은 제2막이 아닌 제1막이었다. 바그너가 ‘탄호이저’파리 공연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리허만 163회 차례 한 것만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1861년 3월 13일 ‘탄호이저’ 파리 공연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관객은 휘파람을 불면서 야유를 퍼부었고 주먹 다툼까지 벌였다. 발레 장면이 제2막에서 제1막으로 옮겨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자키 클럽’멤버들은 겁도 없이 발레 장면을 제2막에서 제1막으로 옮긴 작곡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었다. 이들 청년 귀족은 평소 같으면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제2막 시작 무렵 극장에 도착해 발레리나의 미끈한 다리를 감상했을 것이다. 3월 24일 ‘탄호이저’3일째 공연에서는 공연이 15분씩 여러 차례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연일 계속되는 난동 끝에 ‘탄호이저’ 파리 공연은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승마 동아리로 출발해 국제경마연맹의 효시이기노 한 자키 클럽은 파리에서 스포츠 애호가로 자처하는 젊은 귀족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파리 샹 드 마르스를 경마장으로 개조해 1834년부터 1860년까지 경마를 즐겼다. 마네, 드가, 피카소 등이 그린 경마장 그림도 이들이 부탁한 것이다. 이들이 아지트로 삼았던 카페 드 페(Cafe de Paix)에서 큰 길로 따라가면 곧바로 파리 오페라 극장(L’Opera)이 나온다. 이들은 파리 오페라 극장에 박스석을 여럿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馬)과 발레에 미친 사람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 대포 크기만 한 쌍안경을 들고 공개 장소에서 ‘합법적’ 관음증(觀淫症)을 즐겼다. 당시 언론은 후손이 이 쌍안경을 보면 거인국에서 사용하던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고 썼다.

극장 측에선 자키 클럽은 물론 국회의원ㆍ귀족ㆍ고급 관료ㆍ언론인 등 평소에 잘 모셔야 할 사람들에게 백스테이지 출입 허가를 했다. 이들은 발레리나가 무대에 등장하기 직전 워밍업을 하는 대기실에 들락거리면서 평소 점찍어 놓았던 발레리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드가의 작품‘무용수 대기실(Foyer de la Danse, 1872년)을 떠올리면 된다. 이 그림에는 발레복을 차려입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준비하는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이 비좁은 공간에서 발레리나와 만날 수 있는‘특권’을 누렸다.

‘후견인’을 자처하던 이들은 중간 휴식 시간에 박스석으로 발레리나를 불러들이기도 했고 극장 바깥에서 따로 만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가벼운 매춘’의 대가로 발레리나들은 후견인으로부터 짭짤한 용돈을 받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체 관계로까지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수석 무용수를 제외한 평단원은 월급이 형편없었다. 군무(群舞)를 추는 발레리나들은 주로 하층 서민 출신으로 극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숙식비와 땔감 살 돈이 모자랐다. 1869년에 나온 ‘19세기 프랑스의 가난한 여성들’이라는 책을 보면 당시 여성들은 전업 직장을 다니는 경우에도 월급이 쥐꼬리만큼 적었기 때문에 노동 여건이 열악했다. 여성의 재정적 독립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무대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운 좋으면 부유한 후견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고급 관료들은 정부 예산으로 발레리나에게 비싼 밥을 사주면서 예술 후원자로 자처했다.

파리 오페라에서 발레는 오페라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오페라에 삽입되는 발레 장면 말고도 발레 작품을 따로 제작해 자주 상연했다. 오페라에 삽입되는 발레 장면에선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들은 출연하지 않았다. 오페라는 새로 발레단에 입단하는 단원들의 데뷔 무대이기도 했다. 신입단원은 오페라의 발레 장면을 통해 얼굴을 알리기에 바빴다. 자키 클럽은 그때마다 ‘새 얼굴’을 눈여겨 보았다가 ‘여자 친구’를 물색했다. 당시 발레 교사들은 제자들에게 “발레는 도발적인 포즈와 자태로 관객을 흥분시키는 예술”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고 한다.

오페라 속의 발레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는 노래도 듣고 발레도 보고,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였다. 파리 관객들은 유난히 발레를 좋아했다. 바그너뿐만 아니라 많은 오페라 작곡가들이 파리 상연에 맞춰 발레 장면을 삽입했다. 글룩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중 ‘정령들의 춤’은 파리 공연을 위해 추가된 것이다. 유명 오페라의 ‘파리 버전’은 반드시 발레 장면이 등장한다.

마이어베어‘위그노 교도’, 구노‘시바의 여왕’, 베를리오즈‘트로이인’, 마스네‘헤로디아드’, 생상‘삼손과 델릴라’등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도니제티‘라 파보리타’, 글링카‘루슬란과 루드밀라’‘이반 수자닌’, 베르디‘돈 카를로’‘일 트로바토레’‘맥베스’‘오텔로’‘라 트라비아타’‘아이다’‘시칠리아의 저녁 기도’, 차이콥스키‘스페이드의 여왕’, 로시니‘윌리엄 텔’‘코린트의 함락’, 모차르트‘돈조반니’등에도 발레 장면이 나온다. 대부분이 파리 공연을 염두에 두고 발레 장면을 삽입한 작품들이다. 베르디는‘리골레토’에서도 발레 장면을 삽입해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르디는 오페라‘롬바르디인’에 발레를 삽입한 다음 ‘예루살렘’이라는 제목으로 파리에서 상연했다.

오페라의 발레 장면에도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다른 출연진들이 실제로 추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뚱맞게 갑자기 춤판을 벌이는 게 아니었다. 스토리 텔링에 충실해 줄거리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전쟁 개선장면(아이다), 가면무도회 등 드라마 줄거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장면을 설정해야 한다. 발레리나의 복장도 집시(위그노 교도) 또는 마을 축제나 결혼 축하연(윌리엄 텔)에 초대받은 농민들(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 무도회 참석자, 아니면 파티에 돈을 받고 고용된 춤꾼(라 트라비아타)으로 분장해야 한다.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장소도 이국적인 춤으로 더욱 실감나게 할 수도 있다.

미국 오페라 극장에서도 발레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1883년 10월 개관했을 때 첫 시즌 프로그램에는 아우구스토 프란치올리를 발레 감독으로 명시해 놓았다. 메트 발레단은 121년 이상 존속했다. 1930년대 조지 밸런신 발레단은 메트 오페라의 상주 발레단으로 활동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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