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당선자는 83년 전화기 2대로 '여성의 전화'를 창설해 초대 총무로 일했다.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 등이 동지였다. '여성의 전화'는 당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李당선자는 88년엔 진보적 여성 주간지 '여성신문'을 창간한다. 여성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여성운동사에 그가 남긴 족적은 화려하다. 그가 만든 여성단체만 해도 6~7개에 이른다.
그런 그는 지난 대선의 해인 2002년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당시 대다수 여성운동가가 민주당으로 갈 때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시민.여성단체에선 비난이 쏟아졌고 여성신문 기자 몇명은 항의 표시로 사표를 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엔 진보적 여성운동가가 이미 많이 포진해 있었지만 한나라당엔 거의 없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선 내가 한나라당에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17대 국회에 등원(登院)하면 가장 먼저 여성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라고 했다. "여성의 경제력 확보가 여성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에서다. 그에겐 기존의 정당.정치문화가 불만이다. "여성운동을 할 때만 해도 아이디어가 있으면 바로 실행에 옮겼는데 정치판은 너무 관료적이어서 실천이 느리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운동가 시절의 실천력으로 정치권의 분위기를 바꿔볼 것"이란 포부도 갖고 있다.
이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