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한 뒤 집 한 채 없는 선배 전철 밟기 싫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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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22면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포천시 외곽의 승진사격장. 건군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군이 보유한 첨단 미사일과 공격헬기·전차 등을 총동원한 화력 시범이 열렸다. 나흘 뒤 있을 이명박 대통령의 참관행사를 위한 예행연습 자리였다. 일반 시민과 이상희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주요 인사도 참석했다.

신세대 장교들이 사는 법

초청객 중에는 10여 명의 학군사관후보생(ROTC)도 포함됐다. 하얀 제복 차림의 이들은 함께 온 여학생과 웃고 이야기하며 행사장에 들어섰다. 이들을 지켜보던 한 영관급 장교는 “우리가 생도일 때나 임관할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장관과 장성급 고위 군 간부들이 지켜보는 행사장에서 긴장하는 표정 하나 없이 행동하는 신세대 ‘예비 후배’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최근 병영에 몰아닥친 변화의 바람은 병사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미래 한국군을 이끌고 나갈 지휘관이 될 젊은 장교들 속에도 톡톡 튀는 신세대다운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기 목소리’를 중시한다는 것. 상명하복이 요구되는 군 조직이지만 할 말은 한다는 얘기다. 임관 8년차인 한 위관급 장교는 “과거 휴가 날짜를 잡을 때는 우선권이 늘 선배에게 있었다”며 “요즘엔 후배들이 이런저런 사정을 내세워 먼저 가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신세대 장교들은 군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는 ‘소통’이라고 입을 모은다. 선후배 사이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갈등을 풀어 나가고 부여된 임무를 효율적으로 완수하는 데 필수적이란 인식이다. 군에서 30년 복무했던 국방부 원태재 대변인은 “갓 임관한 후배들이 신세대가 즐겨 쓰는 표현이 가득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와 당혹스러웠던 적도 있다”고 했다. 상관에게 말 거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선배들과는 확 다르단 얘기다.

군 생활 20년을 넘긴 한 영관급 장교는 “군문에 막 들어온 젊은 피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윗사람들의 변화도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고 말한다. 국방부에 근무하는 위관급 장교도 “신세대 후배들에게 과거처럼 윽박질러서는 역효과 내기 십상”이라며 “이해하고 설명해 줘서 수긍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세대 장교들은 자기 계발에도 적극적이다. 한 위관급 간부는 “부대 생활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 외에는 자기에게 투자하는 경향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전방부대나 격오지 근무가 아니면 일과를 마친 뒤 학원에서 외국어를 배우거나 자격증 관련 강의를 듣는 경우도 늘고 있다. 선후배가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거나 영내에서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보내던 모습은 사라지고 있다. 예전처럼 군에서 마련해 주던 위탁교육 등에만 머물러 있다가는 자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긴장감이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퇴근 시간이 다 돼 신세대 후배에게 불쑥 ‘술 한잔하자’거나 번개 회식을 제안했다가 무안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군 간부는 “과거 우리 때와 달리 요즘 후배들이 ‘이러저러한 선약이 있어 어렵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 솔직히 부러운 생각도 든다”고 털어놨다.

재테크를 챙기는 것도 신세대의 특징이다. 한 위관급 장교는 “선배들이 ‘평생 관사로 떠돌다 보니 전역 후 집 한 채도 없더라’고 말하던 전철을 밟고 싶지는 않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말했다. 과거 연금이나 군인공제회에 의존하던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 이 장교는 “수익성 높은 저축상품이나 주식 투자로 재산을 제법 불린 후배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접하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이런 모습에 대해 ‘군기가 빠졌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도 나온다. 하지만 ‘군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조직으로 발전하기 위한 촉매제가 될 것’이란 평가도 갈수록 힘을 얻는 분위기다. 군 안팎에선 신세대 장교들의 이런 모습이 권위주의 군대문화에 변혁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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