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며느리살이' 힘겹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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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기본을 지키는 고부관계"라고 말하는 본지 주부통신원 변소영(37.서울 명륜동.(右))씨와 시어머니 이부자(64.서울 압구정동)씨. 이씨는 며느리에게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변씨는 어른 앞에서 반박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간다고 말한다. [신동연 기자]

경기도 용인군 수지읍에 사는 김원희(64)씨 부부는 매주 토요일이면 양손에 음식 보따리를 들고 서울 영등포 아들 집을 방문한다. 매주 아들 부부 '손님'을 맞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청소도 깨끗이 해둬야지요, 먹이고 반찬 들려 보내고 나면 다시 뒷정리하느라 주말이 아주 고역이었어요." 그래서 김씨 부부는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들어 가고 며느리는 밥만 하게 하니 서로 부담되지 않아 좋다고 말한다.

이순자(58.성남시 분당구)씨 부부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여의도에 있는 아들.며느리 직장 근처로 가 아들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온다. 직장 생활을 하는 며느리에게 주말의 휴식을 주기 위해서다. 아들 부부가 이씨집에 오려고 해도 등산 등의 핑계를 대며 "오지 말라"고 한다. "오라 가라 하면 주말에 쉬지 못한 며느리가 시집을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서"란다.

'시'자 때문에 며느리들이 시금치를 싫어한다는 세상, 화장실과 시가는 멀면 멀수록 좋다는 우스개가 회자되는 시대다. 잡아당길수록 멀어져가는 며느리와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어보기위해 50~60대 '신세대' 시어머니들이 달라지고 있다.

주부 조숙자(57.서울 서초동)씨는 "동창회에서 한 친구가 '주말 마다 시댁에 오라고하면 간 큰 시어머니로 찍히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 모두 웃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외식으로 일은 덜어주고 가능한 한 자주 만나는 기회를 만들려 한다"고 세태를 전했다.

살림을 가르치는 일도 요즘 시어머니들이 자제하는 일 중의 하나다. 3년 전 며느리를 봤다는 박금숙(61.수원시 정자동)씨는 "며느리가 싫어할까봐 냉장고 문 열어보는 것도 자제한다. 살림을 가르치려 해본들 사이만 나빠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예 모른 척 한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노릇은 50~60대의 모임에서 손꼽히는 화제다. 본지 주부통신원 권순자(59.서울 청담동)씨는 "주변에서 '시어머니로서 대접받기를 포기했다.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며 "시어머니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라고 말했다.

가정상담 전문가 구훈모씨는 "무조건 대접받길 원하거나 시키는 대로 따라오길 바라거나 며느리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등 옛날처럼 '부적절한 순종관계'를 요구하는 시어머니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구씨는 "며느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상관없이 시어머니 스스로 매우 자제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변모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상담 통계에 따르면 이혼 사유 중 고부갈등이 첫째 원인이 된 경우는 지난 1998년 70건으로 전체의 3.9%. 그러나 지난해는 15건으로 1%에 불과했다.

이 상담소 박소현 위원은 "며느리와의 관계를 상담하는 시어머니가 고부갈등을 상담하는 며느리만큼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양상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홍수처럼 밀려오는 사고의 변화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구씨는 "균등한 교육을 받은 며느리들이 더 이상 권위주의적인 시어머니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시어머니 세대가 감지해 어쩔 수 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며느리 세대의 취업이 증가하고 분가가 일반화되며 시집보다는 친정 쪽과 더 가까워지면서 시어머니의 개입 여지가 적어진 것도 요인이 되고있다.

또한 박위원은 "이혼이 급증하면서 아들 부부가 제발 잘 살기만을 바라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최근 눈에 띄는 경향"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변모에 속앓이를 하는 시어머니들도 많다. 며느리가 두명 있다는 전모(62.서울 신정동)씨는 "요즘 며느리들이 시집을 싫어하는 수준은 가히 엽기적"이라며 "요즘은 시어머니가 약자"라고 서글퍼했다.

또다른 주부 정모(56.성남시 분당구)씨는 "필요할 때면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면서 시부모에 대한 도리는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구씨는 "요즘 젊은 세대는 경제적으로는 부모에게 의존하면서 자유는 누리고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다가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식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소외감 때문에 시어머니들이 억울함을 누르고 노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moonk21@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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