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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에서>당당한 세계2위 마라톤 이봉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게인,우리의 이봉주,그리고 케냐의 와이나이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장으로 뛰어들었을 때 필자는 마치자신이 그 주자가 된듯한 느낌이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를 달려온지 백여리,마침내 박수가 쏟아지는 주경기장의 트랙으로 달려드는 주자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드디어 여기에 이르렀다는 성취감,이제야말로 최후의 승부가 남았다는 절박감….
앞에는 지칠줄 모르고 기계적인 질주를 계속하는 남아공의 투게인이 있고 바로 등뒤에는 껑충껑충 긴다리로 편하게 달리는 것만같은 케냐의 와이나이나가 있다.어디 단 2시간10여분만의 승부겠는가.그로서는 전생애인 26년의 승부였다.
어디 42.195㎞만의 승부이겠는가.매순간 순간이 피를 말리는 것만 같았을 수만㎞의 질주끝에 이른 결승점이었다.
또 어디 이봉주 한사람의 승부이겠는가.일장기를 달고 뛰어야만했던 36년 베를린의 손기정에서부터 태극기를 달고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한 서윤복을 지나 92년 바르셀로나의 영웅 황영조에 이르기까지 영광과 통한으로 점철된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잇는 걸음걸음이었다.
그 모든 의미들이 한순간에 차올라서 이봉주의 가슴은 터질것만같았으리라.그러기에 그는 최후의 스퍼트를 감행한다.힘을 잃고 뒤로 처지는 와이나이나…하지만 투게인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토록 까마득하게만 생각되던 결승점이 오히려 너무 가깝게만 여겨질때 투게인은 화려한 승리의 제스처와 함께 1위로 골인하고 만다.TV앞에 앉아있던 온국민의 한숨소리가 들리는듯한 순간,이어서 들어오는 이봉주의 표정이 필자는 궁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과연 「세계 2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넋을잃고 주저앉아버릴 것인가.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의 고통에 잠길것인가.그동안 우리의 은메달리스트들은 차라리 꼴찌보다 더 절망스런 모습들을 보여주지 않았던가.그리고 우리가 말없 는 가운데그에게 부여했던 지상과제는 당연하게도 금메달이 아니었던가.
그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결승점에 들어올 것인가.그렇지만 이봉주의 모습은 우리의 값싼 고정관념을 통렬하게 깨트리는 것이었다.그는 우선 태극마크가 선명한 머리띠를 풀었다.얼굴에 기쁜 웃음을 담고 그 머리띠를 호기롭게 애틀랜타의 아침 하늘에 휘두르면서 당당하게,참으로 당당하게 결승점을 통과했다.
2시간12분39초…우승자에 3초 뒤진 은메달이었다.마라톤의 3초 차이를 1백m경주에 비한다면 0.0034초에 지나지 않는다.그정도의 명승부가 나온 것이다.그러기에 이봉주는 당당했다.
남아공 국기를 어깨에 두른 우승자와 나란히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운동장을 도는 이봉주의 모습은 결코 금메달을 놓친 패자가 아니었다.최선을 다해 세계 2위를 달성한 승자였다.
금메달 지상주의,1등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에게 그는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올림픽 은메달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가를….바르셀로나의 황영조에게 미친듯 열광하던 우리는 훨씬 차분하고 속깊은 성취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봉주는 금메달을 「놓친」것이 아니라 은메달을 「따낸」것이다.저마다 각국의 마라톤 영웅인 1백22명의 숨가쁜 각축을 이겨내고….역사가 승자만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봉주의 은메달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비단 이봉주 한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은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들에게,아니 모든 승자와 패자들에게 진심으로 기립박수를보내고싶다. 그자리에 나가 최선을 다해 겨룬 것만으로도 다들 자랑스럽다. 올림픽은 그들의 것이다.장사꾼들의 것일 수가 없다.
고원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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