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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보다 마음을 움직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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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04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EBS-TV는 일관하다. 낮엔 아동 프로, 저녁엔 다큐멘터리다. 오전 8시부터 ‘딩동댕 유치원’ ‘방귀대장 뿡뿡이’ ‘뽀롱뽀롱 뽀로로’ 등 어린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프로들이 방송된다. 그러다 오후 8시부터는 ‘리얼 실험 프로젝트’와 ‘자연의 세계’를 시작으로 어른을 위한 다큐가 시작된다.

타 방송 ‘9시 뉴스’와 같은 시간대에 방송하는 ‘세계 테마 기행’, 해외의 수준 높은 다큐를 선별한 ‘다큐 10’, 전통적인 휴먼 다큐 ‘다큐 人’과 ‘극한 직업’, EBS가 지난해부터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다큐 프라임’ 등 무려 6편의 본격 다큐가 4시간 내내 계속된다. 중간엔 다큐계의 CF, 발랄한 5분짜리 ‘지식 채널 e’가 삽입되며 잠시 머리를 식혀 준다. 월·화요일 자정에는 5년을 이어온 한국 인디 음악의 보고 ‘스페이스 공감’의 라이브와 출연 뮤지션에 대한 짧은 다큐로 방송이 마무리된다.

EBS의 다큐 집중 편성
올가을 EBS의 총 방송 시간 중 다큐의 비율은 24%. 게다가 저녁 황금 시간대 집중 편성이다. 지상파 방송으로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올해 2월부터 매일 오후 11시에 방송되고 있는 ‘다큐 프라임’은 지난해부터 방송국 내 제작 인력의 30%에 가까운 인원을 배정해 길게는 2년에서 짧게는 6개월의 기간을 투자하는 결단으로 고급 기획 다큐 제작을 표방하고 나섰다.

예전의 EBS는 몇몇 어린이 프로와 영화 프로를 제외하면 ‘수능 방송’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다 2004년 별도의 케이블 채널(EBS PLUS1·2)이 설립되어 수능과 어학 프로가 옮겨가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야 됐다. 답은 깊이 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지식 채널’이라는 모토에서 나왔다. 21세기 지식 기반 사회의 새로운 교육 방식으로서 그동안 드문드문 제작해 높은 평가를 받아왔던 장기 기획 다큐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시사 고발이나 자연 풍경 감상, 혹은 눈물을 자극하는 휴먼 다큐가 아니라 다방면의 지식을 심층적으로 취재하고 유려하게 가공하는, 새로운 교육 콘텐트로서의 다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동안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다큐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자연 다큐를 만들어도 동물행동학을 기반으로 인간 사회와 비교하고, 과학 다큐에는 인문학적 성찰이 녹아든다. 교육 다큐에는 연극 배우가 등장해 어떻게 긴 대사를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외울 수 있는지 들려주고, 현대 무예인을 다룬 다큐에서도 굳이 사생활 같은 것은 파헤치지 않는다. 집단 심리에 관한 실험을 재현하면서 지하철 화재 참사 같은 시사 사건과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준다. 그러자 9시 뉴스에 짜증 나고 10시 드라마의 시청률 경쟁에 염증을 느낀 시청자의 호응이 이어졌다. 지적이고 학문적인 콘텐트에 대중성을 불어넣는 영상 언어의 힘이다.

이미지 변주와 재활용의 힘
요즘 EBS에서 제작되고 있는 다큐는 이제껏 보아온 담백한 촬영 화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인터뷰 장면에 어안 렌즈를 사용해 인물과 배경을 둥글게 왜곡시켜 놓는다든지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영상에 화려하게 수를 놓는다. 홈페이지 다시 보기 코너에서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지식 채널 e’가 가장 극단적인 예인데, 전통적인 다큐 형식인 내레이션을 사용하지 않고 이미지 컷들의 몽타주와 자막에 감성적인 음악만으로 영상을 채웠다.

한 화면에 담기는 정보의 양을 줄이고 영상미를 추구하면서 이성보다 감각을 자극하는 경향은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는 다큐의 기본적 정의와는 차이가 있다. 다른 다큐들도 내레이션을 넣지 않거나 자막을 화면 가득 띄우는 식의 영향을 받았다.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내용을 전달한다는 것은 직접적인 주장이나 계몽을 삼가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감각적 ‘공감’을 전략으로 삼는 탈권위주의적 방식이다.

이런 시도는 보통 방송사들이 목매는 ‘시청률’과는 그다지 상관없다. 공익 방송이기 때문에, 그리고 KBS 같은 종합 편성 방송사가 아니라 전문 편성 방송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유열 EBS 편성기획팀장은 “대중성은 낮아도 주목성은 높은 고품질 기획 다큐에 집중하게 된 것은 재활용(재방송)을 염두에 둔 전략이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저녁 시간대 다큐 집중 편성 역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되면 “제작비 단가 대비 시청률은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상태를 만들 수 있다. 김 팀장은 최근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고급화·대형화한 다큐 제작에 역량을 기울이고 있으며 올 11월에 방송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재현한 다큐 ‘한반도의 공룡’도 기대해 달라고 주문했다.2008년 EBS 제작 다큐 10선

결혼 안식휴가(2부작)
아내는 안식휴가를 떠나고 남편은 대신 육아와 가사를 꾸려가는 부부 3쌍의 삶을 밀착 기록. KBS-TV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채택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당신의 과학(3부작)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힘을 낼 수 있는 걸까? 눈물은 왜 나오는 걸까? 같은 일상 속 과학 현상을 그래픽이 아닌 HD 고속촬영 등 아름답고 명료한 이미지로 쉽게 풀어낸다.

영상 무예도보통지(2부작)
조선 정조시대에 완성된 무예 교과서 『무예도보통지』의 탄생 과정,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무인으로 살아가며 무예의 역사와 전법을 재연하고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했다.

아이의 사생활(5부작)
어른들이 막연히 생각해 오던 아이들의 성격과 지능, 남녀의 차이 등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제작 1년, 설문 4200명, 실험 참여 어린이 500명, 국내외 자문 교수 70명에 이른다.

동과 서(2부작)
동서양의 사고 방식 차이를 비교한 문화인류학 다큐. 차이의 기원과 그로 인해 어떤 사회적 현상이 발생하는지, 간단한 생활 속의 실험을 통해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두 얼굴(3부작)
상황에 지배당하는 인간, 상황을 지배하고 바꾸는 인간, 사소한 기적을 이뤄낸 영웅들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을 이용한 몰래카메라 심리 실험으로 폭로한다.

초등생활 보고서(3부작)
“키가 140cm보다 작은 아이들이 우수해요.” 조례 시간,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동요하는 아이들. 차별에 관한 실험을 하면서 장기간 초등학생들의 생활을 들여다본다.

성장통(3부작)
소년기의 찬란했던 ‘꿈’이 시들며 어른이 되어 반려자와의 ‘만남’을 찾아 헤매다가 ‘나이’ 든 노인이 되어 사회에서 밀려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각 100여 명의 인터뷰를 편집했다.

리얼 실험 프로젝트 ‘전기 없이 살아가기’
자동차와 휴대전화, 생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직업과 관계된 전기를 제외하고, 가정에서 전기 없이 2주간 생활하는 서울 재즈가수 말로와 강원도 농가 두 가족의 이야기다.

원더풀 사이언스 ‘소통의 길, 터널’
무심히 지나쳤던 터널 속에 최첨단 과학이 숨어 있다. 지하철 분당선 한강 하저 터널, 국내 최장 배후령 도로 터널, 알프스 산맥의 터널 공사 현장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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