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주택 공급보다 위기 극복이 더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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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가 앞으로 10년간 주택 500만 채를 짓는 것을 골자로 한 대규모 주택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수도권의 그린벨트 100㎢를 추가로 풀고, 서민용 주택에 대해선 용적률을 200%까지 높이겠다고 한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주택 물량 공세가 아닐 수 없다. 국토해양부는 이번 주택 공급 계획이 “집값을 하향 안정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대규모 주택 공급 확대는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은 데다 방향도 잘못 잡았다. 정부는 집값을 낮추기 위해 공급을 대폭 늘리겠다고 했으나 집값은 이미 떨어지고 있다. 지방에선 미분양 아파트가 쌓여 처치 곤란일 지경이다. 우리는 그동안 공급 확대를 통한 주택가격 안정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집값이 다락같이 오를 때의 얘기다. 집값이 이미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대규모 신규 물량을 퍼부으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지금은 집값 하락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정책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정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규모 주택 공급 확대로 인한 집값 하락이 몰고 올 금융위기의 가능성이다. 무차별적인 공급 확대로 부동산시장이 곤두박질할 경우 지나치게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이 부실화하면서 한계에 몰린 금융회사들이 줄도산할 우려가 크다. 자칫하면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를 자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의 부동산 가격 하락에서 촉발된 세계적인 금융 불안에 우리 경제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과 신혼부부 가운데 무주택자를 임기 중에 없애겠다”며 “(그린벨트 지역에) 이들을 위한 임대주택과 전세주택을 50만 호 짓겠다”고 했다. 그러나 서민과 신혼부부가 내 집을 마련할 돈이 부족한 것이지, 들어갈 집이 없어서 거리에 나앉는 상황이 아니다. 임대주택을 더 짓는다고 주택마련자금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정작 집이 부족한 곳은 수요가 몰리는 수도권 도심 지역이지, 수도권 외곽의 그린벨트지역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무작정 그린벨트를 풀어 임대주택을 짓겠다면서 도심 재개발과 재건축 규제는 풀지 않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번 주택 공급 확대 계획에는 건설경기를 부추겨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땅 파고 집 지어 경기를 살리겠다는 토건국가식 발상으론 경기를 살리지도 못할뿐더러 오히려 새로운 부동산 거품만 키울 우려가 크다. 정부는 우선 과거 개발연대식 사고방식에 대한 집착부터 버려야 한다. 그런 낡은 고정관념이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낳는다. 세계적인 신용경색에 기업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마당에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을 모아놓고 투자와 고용을 늘리라고 촉구한 것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뜻은 좋지만 생존이 급한 기업들에 투자를 늘리란다고 투자가 늘어나겠는가.

지금은 무리하게 경기를 살리려고 일을 벌일 때가 아니다. 눈앞에 닥친 위기상황에서 경제의 불안요인을 걷어내고 미래의 성장을 위한 기초를 다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