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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진주, 더 웨스턴 갤리스 골프 클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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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골프의 파라다이스라는 별칭이 붙은 스코틀랜드의 Ayrshire 지역에는 세계적인 명코스들이 즐비하다. Royal Troon GC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진 The Western Gailes GC. 이 역시 순수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스코틀랜드 링크스 중의 하나다.

1897년 골프장 관리인에 의해 최초로 조성된 코스는 비록 브리티시 오픈을 개최하지는 못했지만 근처의 턴베리 골프장이나 로열트룬 골프장에서 브리티시 오픈이 개최될 때마다 최종 퀄리파잉 골프장으로 활용될 만큼 코스가 출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The Curtis Cup, the PGA 챔피언십, 시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 등을 수 차례 개최한 이력 만으로도 질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골프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주황색 지붕에 흰 외벽을 한 깔끔한 클럽하우스. 내부로 들어가보니 멀리 해안선과 코스 전반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로열트룬처럼 권위적인 느낌은 없었다. Visitor 플레이도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코스 랭킹은 영국에서 20위권 내에 들고, 레이아웃이나 수준도 로열트룬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브리티시 오픈 개최지가 아니기 때문에 Visitor들의 범주는 아직 그만큼 세계화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코스에서 만난 멤버들도,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직원들도 몸 둘 바를 모르게 친절했다.

자신을 Henry라고 소개한 할아버지 스타터는 80살은 족히 되어 보였다. 출발자들에게 코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로컬 룰 몇 가지를 상기시켜 주셨다. 내 티샷이 자신이 알려준 그 방향으로 정확히 날아가자 자신의 일인양 기뻐하며 하이파이브를 청해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골프장에 대한 느낌은 누군가와의 작은 인연 하나가 결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곤 한다. Henry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꽉 쥐었던 손바닥의 단단한 결속력은 이미 내 머리 속에서 웨스턴게일즈 골프장을 로열트룬 보다 상위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그저 누가 말 한 마디라도 이쁘게 해주고, 물 한 잔이라도 건내주면 그 골프장 순위가 치솟아 버리는, 객관성을 배제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그러나 솔직한 판단 기준이다.

Irvine 해안선과 평행으로 놓여진 철길 사이에 길게 2열 종대로 늘어선 18홀 코스는 바다와 철길 사이를 비좁게 파고 들어있기에 페어웨이가 더욱 좁게 느껴졌다. 18홀 라운드를 하면서 기차는 여객용과 화물용을 포함해 대략 3대 정도를 보낸 것 같았다. 파5 홀이 2개, 파3 홀이 3개인 파71의 6639yd 전장의 비교적 짧은 코스이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아 인내심과 집중력을 동시에 시험할 수 있는 코스였다. 플레이는 링크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내 머리 속에서 링크스는 아직 세분화된 Sorting 기준이 없었다. 그저 코스 한 쪽으로 바다를 끼고 움직이고, 매 홀마다, 아니 매 샷마다 바뀌어대는 바람에 적응하고, 무릎 높이로 올라오는 억센 러프에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공이 멈춰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깜빡이지 못하고 바람에 맞서 충혈된 눈을 부릅떠야 하는 바다 코스. 페어웨이는 우마차 도로만큼이나 좁고 거칠며 바닷가 잔 파도의 반사광이 눈을 자극하는… 대충 그런 하나의 이미지로 뭉뚱그려져 있을 뿐이다. The Western Gailes GC는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링크스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다.

수시로 변하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 모래 언덕으로 가려진 그린은 굴곡도 험난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페어웨이의 언듈레이션, 나무와 굽이치는 개울에 의해 페어웨이는 곳곳이 절단되어 있었다. 특히 5번 홀부터 13번 홀까지는 줄곧 오른쪽에 바다를 두고 플레이를 펼쳐야 하기에 심리적 부담이 컸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바다나 개울 보다 위협적인 것은 모래 언덕에 가려진 그린 공략이었다. 아예 세컨 샷 지점에서도 그린이 보이지 않는 17번 홀에서는 큰 십자가 모양의 기둥을 세워 그린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17번 홀, 정말 죽음의 홀이었다. 비단결 같은 맘씨 다 버려 놓은 홀.... 공을 두 개나 잃어버렸다. 링크스의 불가사의는 분명히 볼이 떨어지는 낙하지점을 정확히 보고 갔는데도 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러프로 들어간 볼은 운 좋게 그 공이 내 발에 밟히지 않는 이상은 다시 찾기가 힘들었다. 어찌나 공략이 어려운 지 17번 홀의 십자가는, 볼의 사후 세계를 염원하고 플레이어의 무사 안위를 염원하는 의식용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The Western Gailes GC는 디오픈을 개최하지 못했을 뿐 로열트룬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좋은 골프장이었다. 두 골프장이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면에서도 거의 동일했고, 잔디며, 수종이며 차별성을 찾기 힘들었다. 관리나 홀 별 특성은 오히려 더 나아 보였다. 특히 손님에 대한 친밀도나 서비스는 월등했다.
굳이 '디오픈 개최지'라는 타이틀을 사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차라리 부킹도 쉽고, 코스도 좋고, 무엇보다 뒷팀에 마음 쫓기지 않고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이 곳을 더 추천하고 싶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