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代 국회 '신주류'가 뜬다] 3. '현장' 출신 당선자들(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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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낮 대전의 한 음식점. 양장 차림의 현애자 민주노동당 당선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여성 농민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자신을 국회로 보낸 전국여성농민회 전.현직 간부 20여명과의 간담회 자리다.

그는 "5월 초까지 전국 9개 도(道)를 돌며 전여농 지역 간부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전여농에서 추천해 당선된 만큼 바닥의 목소리를 빠짐없이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7대 국회에 진출한 70여명의 재야 출신 당선자. 그중 상당수가 등원을 코 앞에 둔 채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날만 해도 민노당 단병호.노회찬.강기갑.최순영 당선자가 사방으로 흩어져 각 노동자.농민.여성단체를 찾았다.

자신을 길러 국회에 진출시켜준 '현장'을 찾기 위해서다. 이전 국회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이번 17대 국회에 진출한 재야 출신은 크게 늘었다.

16대 총선 후 국회사무처가 낸 '역대 의원 경력 분류'에 따르면 '야당 돌풍'이 몰아친 12대 때 5명이 원내 진출에 성공한 이후 재야 출신은 ▶13대 8명 ▶14대 9명 ▶15대 10명 ▶16대 11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그랬던 게 17대에선 재야.운동권 출신이 폭발적으로 증가, 70명을 웃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질적 변화다. 한평생 노동.농민운동을 해왔거나 본인이 소외 계층인 '현장의 정치인'들이 대거 의회에 몰려온 것이다.

특히 민노당에선 그간에 정치권으로 수혈됐던 재야세력과 이번에 의회에 진입한 현장 출신 사이에 확연한 선을 긋는다.

김종철 민노당 대변인은 "노동운동이나 지역운동을 잠시 거친 뒤 정치권으로 들어온 기존 정당의 학생운동권 출신과는 달리 현장 출신 당선자들은 오랜 운동을 통해 민중의 진정한 아픔을 아는 정치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기준에 맞는 당선자를 꼽아보면 18명 정도. 민노당이 압도적으로 당선자 10명 전원이 이에 해당된다.

열린우리당엔 6명, 한나라당엔 2명이 포진해 있다. 민노당의 경우 민주노총에 기반을 둔 때문인 듯 노동현장 출신이 다수다.

농민운동가인 강기갑(전농 부의장).현애자(남제주군 여성농민회 회장), 그리고 여성운동가로 분류되는 최순영 당선자를 빼곤 죄다 노동운동가다.

열린우리당에선 노동운동가 3명에 빈민운동가인 이상락, 농민운동가인 박홍수 당선자와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인 장향숙 당선자가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시각장애인인 정화원,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인 배일도 당선자가 비례대표로 뽑혔다.

현장 출신들의 대거 입성에 대해 재야단체에선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참여연대 홍석인 간사는 "노동자.농민.빈민.장애자 등 각 계층 출신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했다는 것은 소외계층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민노당의 경우 노동.농민단체 등이 상향식으로 추천한 인물이 후보로 선정돼 당선됐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둔다.

천영세 부대표는 "아무리 투철한 재야 출신이라도 기성 정당에 스카우트돼 들어갈 경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뽑아준 당 지휘부의 뜻이나 당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게 도리어 독(毒)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려다 전체를 그르칠 위험이 있다는 논리다.

노동이론가인 열린우리당 이목희 당선자는 "국회에서 노사관계를 다룰 때면 노동조건뿐 아니라 경제 성장 문제 등도 간과해선 안 된다"며 "노동단체 출신 의원이라고 그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니 해결하라'는 식이 돼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도 "국회 진출 후에도 이상만을 추구하는 운동가로 계속 남으면 합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현실정치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파격은 현장을 누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옷차림에서부터 당 운영까지 정치권 구석구석에 싱그러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 개혁당 소속이던 유시민 의원이 면바지 차림으로 첫 등원했다가 눈총을 받았지만 민노당 내부에선 소속 의원들이 전원 개량한복 차림으로 나가는 게 어떠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실제로 강기갑.현애자 당선자는 주로 개량한복을 입는다. 또 기성 정치권에선 당연시되던 관례들도 깨지고 있다.

민노당 당선자들은 전용 운전기사를 두지 않기로 했다. '돈 먹는 하마'로 지목돼 없애기로 한 지구당에 대해서도 "왜 없애느냐"는 반론을 편다.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운영하면 얼마든지 돈 안드는 지구당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장으로부터의 유쾌한 반란은 이미 시작됐다.

남정호.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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