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지주사와 합병해 금융 산업의 지도를 바꾸겠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9일 포문을 열었다. 29일로 예정된 국민은행의 지주사 전환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다. ‘금융계 검투사’로 불리는 그가 던진 승부수는 우리·신한·하나 등 다른 금융지주사와의 합병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은행이나 증권사 등을 놓고 벌이던 은행권의 인수합병(M&A) 논의가 일순 ‘금융 공룡’ 간의 ‘진검승부’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누가 사고 누가 팔리는지 막판까지 분간할 수 없는 ‘지주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선전포고=전쟁을 하려면 명분·실탄(자금)·전략이 필요하다. 황 회장이 이날 건 명분은 ‘국가대표론’이다. 그는 “제일 크다는 국민은행이 세계 100위권에 턱걸이하는 수준”이라며 “좁은 땅에서 여럿이 다투어서는 금융산업을 키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탄은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떠안게 된 4조원가량의 자사주다. 이를 연내에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팔아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략은 ‘대등합병론’이다. 황 회장은 “갑이 을을 먹는 ‘인수(acquisition)’가 아닌 대등 ‘합병(merger)’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대한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또 대등 합병으로 회사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주주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합병 예상 시기에 대해 황 회장은 “상대방이 있는 문제라 단언할 순 없지만 희망은 내년 상반기, 늦어도 내년까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 지주사와의 결합이 가장 유리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도상연습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승자는 누구?=외환위기 이후 국민은행은 리딩뱅크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하지만 위태로운 1등이다. 외환은행 인수가 어려워진 사이 은행 부문은 우리·신한에 쫓기고 있다. 카드·증권 등 비은행 부문의 경쟁력도 여타 금융지주에 비해 뒤처진다. 황 회장의 ‘지주 간 합병론’은 이런 난국을 한번에 타개할 수 있는 방안으로 해석된다.
국민이 지주사가 되면 경쟁 판도는 국민·우리·신한지주가 3강을 이루고 하나지주가 뒤쫓는 형태가 된다. 자산으로 보면 우리가 318조원으로 가장 앞서지만 3강 간 차이는 20조원 안팎이다. 대형 지주사 간 합병이 실현된다면 누구라도 선두로 치고나갈 수 있는 구조다.
◆은행 빅뱅 올까?=타 금융지주사들은 다소 냉소적이다. 신한금융과 우리금융은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하나금융 관계자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황 회장이 판을 흔들어 경쟁 구도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끌고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금융지주 회장 시절 ‘토종은행론’을 내세워 한 차례 은행권을 뒤흔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는 얘기다.
어떤 식으로든 은행산업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데는 상당수 전문가가 동의한다. 문제는 지주 간 합병의 실현 가능성이다. 하나대투증권 한정태 애널리스트는 “은행산업이 성장하려면 추가 빅뱅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대형 금융사 간 주도권 경쟁과 주주들 간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단시일 내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금융지주사=은행·증권·보험 등 금융사를 자회사로 둔 지주사다. 은행·신용카드·증권·자산운용 등의 원스톱 금융 서비스가 가능하고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01년 우리금융과 신한금융에 이어 2005년 하나금융도 지주사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