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地圖>문학 20.非등단작가 베스트셀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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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어렸을 때,지금은 찾아보기조차 힘든 『자유공론』이나 『새농민』등의 잡지에 실렸던 『안나 카레리나』나 『에덴의 동쪽』을 읽은 기억이 있다.그 기억의 다른편에서 나를 더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것은 지금처럼 「옐로 페이퍼」를 쉽게 접할 수 없던 시절그와 거의 맞먹는 호기심으로 읽은 수많은 무협지와 애정소설들이다. 그 유명한 김래성(金來成)의 소설 『청춘극장』과 『벌레 먹은 장미』를 읽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대부분 뻔한 결말과지극히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그 읽을거리들은,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리는 행복과 사랑과 화해의 실체가 가짜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나를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마력을 발휘했다.
대체로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보여주는 특징중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 약점이나 호기심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는 점이다.
처음 몇장만 읽으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단박 알 수 있는 단순한 내용과 구조,감정에의 직선적 호소,근본적으로 존재론적 불안을 안고 있는 대중의 마음을 교양 욕구와 지적 호기심으로 보상하려는 것등이 그렇다.
해방후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명멸해 갔다.이 베스트셀러의 작가들중에는 문단 등단절차를 밟은 이른바 「제도권 문인」보다 「비제도권 문인」들이 많다.때문에 평단에서도 논의의 대상에서 대개 배제된다.
김래성의 『청춘극장』과 『벌레 먹은 장미』는 6.25를 겪으면서 읽을거리가 거의 없던 시절 청.장년층,심지어 중.고생층까지 광범하게 파고든 소설이다.50년대 풍속을 상징적으로 재현한정비석(鄭飛石)의 『자유부인』이 지식층을 파고들 며 「공식적으로」 화제와 논란의 도마위에 올랐다면 『청춘극장』과 『벌레 먹은 장미』는 입에서 입을 통해 암암리에 읽혔다.그러면서 성에 눈뜨게 해 연애학 지침서 구실까지 해냈다.
60년대 들어서면 박계형(朴啓馨)의 장편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을 꼽을 수 있다.64년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朴씨를동양라디오 현상문예 당선자로 만든 이 작품은 66년 출간돼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 소설이 당시 많은 독자를 끌어들인 이유는 교양체험 이상의사회적 일탈의 정서에 대한 폭넓은 교감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인간의 사회적 일탈의 이야기에 대한 집착은 거의 성적집착과 맞먹는다.대중적 베스트셀러들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든다.
때문에 베스트셀러의 등장에는 「우연의 필연」이라 할 반시대적.
반문화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돼 있어야 한다.
그 시대가 바로 70년대다.경제개발 최우선 정책과 유신으로 넘어가는 독재는 『별들의 고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에 나오는 경아나 영자 같은 수많은 술집여자를 만들어냈다.억눌린 말과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없을 때 술집에서 실컷 취하고 그 여자들과 어울리던 것과 같이 독자들은 그러한 소설속으로 빠져들었다.
70년대 들어 대중문학.상업문학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또한국적 자본주의 발전의 영향이 컸다.서서히 붕괴돼가는 농촌과 상대적으로 급증한 도시빈민의 유입은 그 시대 소설가들이 당면한고통스럽고 절실한 문제였지만,그런 소설들은 읽 히지 않고 대중과 영합하는 상업적 소설만 읽혔다.솔직히 필자는 70년대 이른바 제도권 문인들의 베스트셀러와 비제도권 문인들의 그것들을 주제적 측면에서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다.단지 제도권 문인들의문장과 구성이 좀더 세련됐을 뿐이 다.70년대에는 비등단 문인들이 베스트셀러 작가군에 거의 낄 수 없었다.본격작가들이 대중지향적 작품으로 독서시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5.18로 열린 80년대에는 대중의 정서를 바꿔놓을 가능성은충분히 있었으나 감정에 직선적으로 호소하는 제도권 작품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행진을 했다.독자들이 김홍신(金洪信)의 『인간시장』을 통해 폭력과 군사문화에 억압된 감정을 대리로 푸는 식이었기 때문이다.본격문인들의 대중문학 지향성이 일단 진정되고 또 진보적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80년대후반 들어 비제도권 문학이 베스트셀러로 속속 진입하게 된다.
이해인(李海仁)수녀의 맑고 잔잔한 감성시집『민들레의 영토』가베스트셀러로 나서더니 이내 무명시인들의 낙서같은 시집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또 김정빈씨의 『단』을 시작으로 이은성(李恩成)씨의 『소설 동의보감』,이재운(李載雲) 씨의 『소설 토정비결』,황인경씨의 『소설 목민심서』등 「이상한 역사교양적 읽을거리」가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1백만부 단위로 팔리며기세를 펴기 시작하며 90년대 비제도권의 본격상업문학시대를 맞게 된다.이러한 추세를 타고 90년 대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은4백만권 이상 나간 김진명(金辰明)씨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 작품으로 무명의 金씨는 막대한 인세와 함께 슈퍼셀러 작가로서의 유명세를 타고 국회의원후보로까지 진출했었다.
문학이 걷잡을 수 없이 상업성으로 휘말려들고 있는 이 때 이제 더이상 제도권.비제도권 등 문단의 양분은 효력을 잃은 것 같다.소위 본격문학.순수문학을 하는 문인들은 이제 독서시장 밖으로 밀려나 비제도권 문인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독 자를 석권하는 상황을 넋놓고 바라보는 형국이 됐으니 말이다.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이제 등단문인.비등단문인의 구분을 떠나 무엇이 문학이냐,아니냐 하는 고전적 명제를 놓고 전면적 싸움을 벌여야 한다.문학의 이름으로 더이상 독자,나아가 사회와 인간성을 훼손하지못하도록.
신철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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