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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호철 귀향방북기

중앙일보

입력

고려민항 비행기에 탑승해 북한의 대표적인 문학잡지인 '조선문학' 7월호의 '그의 소원' 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한 편을 막 읽고 났을 때, 곧 내린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김포공항을 이륙하고 꼭 53분 만이었다. 내려서도 수속 일체를 거의 생략하고 버스에 올랐으며, 창 밖으로 보이는 정경은 1998년 여름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평양거리로 들어서자마자 첫 인상으로 다가온 것은 우선 평양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이었다. 하나 같이 진정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이 살갗 깊숙이 와닿았다. 두 달 전의 '6.15선언' 을 북한 사람들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우리 일행 숙소로 정해진 고려여관으로 들어설 때는 호텔 종업원 전원이 총 출동하다시피 손뼉을 쳐 맞이했다. 나는 일단 20층 4호실에 장가용 교수와 같이 여장을 풀었다.

그렇게 호텔 방에서 원경으로 내다본 평양 거리로 말한다면 일단은 98년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고려여관도 그렇고, 98년에 내가 묵었고 이번에 누이동생과 서너시간 단 둘이 단출하게 만났던 보통강여관도 매한가지였지만, 호텔 치고는 너무 우람하다고 할까, 엉성하다고 할까. 그 점도 98년에 받았던 인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뭐랄까, 이렇게 양측 1백명씩 교환방문이 이뤄진 것에 대한, 그리고 이것이 지난 85년처럼 1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기점으로 남북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된 것에 대한, 북쪽 산하의 활기찬 반응까지 안자락으로 깔린 북한 인민들의 환호성은 벌써 가슴으로 싸목싸목 와 닿았다.

특히 이번 여정에서 나에게 가장 뜨겁게 와닿은 것은 물론 누이동생을 만난 일이었지만, 그 밖에도 두 가지가 더 있었다. 그 하나는, 98년 체류했을 때 안내했던 분 중의 한 사람이 바쁜 중에도 세번씩이나 나를 찾아와 챙겨준 점이고, 또 한가지는 옥류관의 김경선 접대원 동무였다.

98년에도 옥류관에서 냉면을 대접받았는데, 으레 흔히 그러듯이 이 때도 점심을 먹은 뒤 '방명록' 을 내놓으며 한마디 적어 달라고 해 나는 서슴없이 그 걸 받아들고 이렇게 썼던 것이다.

"옥류관의 냉면도 물론 그지없이 맛이 있었고, 특히 접대원 김경선 동무의 영롱한 목소리와 우아한 눈길이 매우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1998년 8월 28일, 서울서 온 리호철" 이라고.

그뿐, 작별 인사를 하고 무심히 옥류관의 그 긴 복도를 나와 밖에 세워두었던 차에 올라 탔는데, 금방 내가 나온 출구 쪽 느낌이 조금 묘해서 문득 눈길을 들어 그쪽을 쳐다본즉 방금 전의 그 접대원 동무가 그 긴 복도를 뒤쫓아나와 문 곁에 부끄러운 듯이 붙어서서 나를 향해 깊이 머리 숙여 큰 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렇게 내가 한번 그쪽을 돌아보기를 조바심 섞어 안타깝게 기다리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나는 보통 수준의 평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격려를 해주고 즐겁게 해주자는 가벼운 마음에서 그 방명록에다 그렇게 몇자 썼던 것인데, 거듭거듭 썩 잘 했다고 생각되며 나도 무언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랬다. 별 일도 아닌 그런 일 쪽이 차라리 깊은 추억으로, 그리고 일말의 따뜻한 보람으로 남던 것이었다(이상의 삽화는 98년에 다녀와 펴낸 '방북기' 도 포함된 '한 살림 통일론' 이라는 책자에 더 자세히 적혀 있음) .

이번 방북 길에서도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저녁, 평양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주최의 환송 만찬회가 있었는데, 어찌어찌 내가 온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그 김경선 동무가 내 자리로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내 이름 석자까지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곤 냉면 3백g을 더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이 때 나는 술도 얼큰히 취해 있었고 배도 불러 있었으나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깨끗이 그릇을 비웠던 것이다.

이날 밤의 연회 맨 끝머리에는 전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선창을 바로 김경선 동무가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점도 나로서는 일말의 흐뭇함으로 다가오던 것이었다.

요컨대 우리 남북관계란 어렵게 생각하자고 들면 한량없이 꽤 까다롭지만, 쉽게 생각하자고 들면 무척 쉬울 것도 같다는 것이 이번 방북 길에서도 다시 확인한 나의 생각이다.

남북간에 사사롭게 많이 만나고 그렇게 개개적으로 만나는 만큼 정분을 쌓아가며, 부분부분으로 형편 형편만큼 남북간에 한 솥밥을 먹는 빈도가 늘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것이 바로 남북이 '한 살림' 으로 들어서는 통일의 시발점이 아니겠는가.

이호철 <소설가.경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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