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전신마비 교수의 희망방정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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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교통사고로 목 아랫부분이 마비된 이상묵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연구실에서 어떻게 강의를 준비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0.1그램의 희망
이상묵·강인식 지음
랜덤하우스, 341쪽, 1만1000원

1970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이국 땅에 온 소년은 학교 도서관에서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그 속에는 세계 곳곳의 바다와 사막, 계곡과 산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은 연재만화를 기다리듯 매달 나오는 이 책을 고대했다. 책의 제목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통해 자연을 탐구하던 소년은 미국 MIT대학에서 지구과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됐다. 1년에 평균 3개월을 바다에서 지내며 해저 지형을 연구했다. 누구보다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그가 목 아랫부분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다. 2006년 미국 데스밸리 지질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차량 전복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했다. 기적 같은 재활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한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에는 ‘서울대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교수, 강단에 선 그는 슈퍼맨이었다’는 제목이 달렸다.

이 책은 서울대 이상묵 교수와 그를 취재한 중앙일보 강인식 기자가 함께 지은 책이다. 강 기자는 책을 내기 위해 이 교수를 50여 차례 만났다고 한다. 사고로 기도를 다쳐 횡경막만을 이용해 발성해야 하는 이 교수로선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책의 제목 ‘0.1그램의 희망’에서 암시하듯, 이 교수가 재활에 성공한 것은 ‘긍정의 힘’ 덕분이었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사고로 장애를 입었지만 다시 재기해 활동하는데 필요한 최소의 부분은 하늘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희망이라는 단 하나를 남겨주셨다”고 말한다. 희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사고 직후 절망에 빠졌을 때도 운명을 탓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아봤다고 한다. “나 때문에 피해와 손해를 보았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렸다. 가장 먼저 두 동생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장남인 내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두 동생은 서러웠던 때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며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몸이 점점 가벼워지며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교수는 입으로 빨아 작동하는 특수마우스를 통해 컴퓨터를 이용한다. 손도 꼼짝할 수 없지만 IT기술의 도움으로 강연과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이용하는 음성인식프로그램엔 ‘한국어판’이 없다. 그래서 이 교수는 요즘 한국어 음성인식 프로그램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다닌다고 한다. 그는 “IT기술은 장애인에게 신이 내려준 축복과도 같은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이 교수가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다는 MIT에서 겪은 경험도 흥미롭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이혼율이 70%에 이른다는 MIT 교수들이 제자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그치는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과학을 전공하고 있거나 앞으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겐 좋은 자극이 될 것 같다.

이 교수가 사고를 당했을 때 한 차에 타고 있던 제자 이혜정씨가 숨졌다. 그는 제자를 추모해 조그만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이 책의 인세는 전액 ‘이혜정 장학기금’에 출연된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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