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梨大의 기혼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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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22년 10월18일 이화여고보의 6대 교장으로 취임한 아펜젤러는 학교가 언젠가는 한국여성에 의해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교에 재직중인 박인덕(朴仁德)을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다.좀 더 큰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 아펜젤러교장이 은밀하게 미국웨슬리언대학에 유학을 주선하고 있던중 박인덕은 스승의 뜻을 저버리고 한 부호(富豪)의 자제와 결혼했다.박인덕은 학교도 그만두었고,아펜젤러는 그 꿈을 곧 박인덕의 3년 후배인 김활란(金活蘭)으로 바꿨다.
박인덕의 결혼생활은 불과 몇년만에 실패로 끝나고 미국에 건너가 생활하다 60년대 중반 고국에 인덕실업학교를 설립하는등 「이화」와는 관련없는 삶을 살게 되지만 그것이 「이화」의 운명이달라질 수도 있었던 첫번째 「사건」이었다.5.1 6군사쿠데타 직후인 61년 9월 혁명정부의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김활란이 총장직을 물러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김정옥(金貞玉)등 몇몇이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김활란은 이름조차 생소한 40 세의 「처녀」 김옥길(金玉吉)을 후임자로 지명한 것이다.
79년 봄 김옥길이 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표했을 때 재단이사회에서는 「기혼 총장」문제를 조심스럽게 논의했으나 김옥길은「앞으로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정의숙(鄭義淑)을 천거했다.김활란.김옥길과 같이 역시 「미혼의 독실한신앙인」이란 공통점을 갖춘 것이다.
이대(梨大)의 학칙은 「미혼」을 총장이 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으로 규정하지 않는다.「외국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한다는 정도로만 제한을 두고 있을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미혼이어야만 총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기에까지이른 까닭은 무엇일까.
똑같은 여건에서라면 미혼여성이 기혼여성보다 학교를 위해 전력투구할 수 있고,우리의 전통적 가족제도와 사회의식 속에서 기혼의 여성총장은 여러가지 제약에 얽매이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일것이다.하지만 시대는 많이 달라졌고 그런 발상에 서 탈피할 때도 됐다.새 총장에 기혼여성이 선출된 것은 그런 점에서 1백10년의 역사를 쌓은 이화여대의 변모된 새 모습이라 할만 하다.
김옥길 전총장의 「언젠가는」이 다소 늦은 감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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