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52. 빛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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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개국 드라마를 쓴 동아방송의 국장이었던 최창봉씨.

1963년 동아일보가 방송국을 만들었다. HLKZ-TV의 최창봉씨가 실질적인 국장역을 맡았다. 그가 의욕적으로 모든 프로를 진행한 데다 동아 특유의 비판적 성향이 두드러져 동아방송의 인기가 대단했다.

나보고 개국 기념 드라마를 써달라고 했다. 영광이다. '5월의 꿈'이라는 것을 썼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가 아메리카의 비극이라면 내 작품은 한국의 비극이다. 비교적 잘 나갔다.

그때 서울신문 사장에 해군 출신 양순직씨가 부임했다. 나를 부르더니 연재소설을 써달라고 했다. 응했다. 제목은 '또리 자서전'이다. 개가 주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일본 작가 나스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것이 있다. 일본 현대문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나는 나스메 소세키를 만난 적도 없지만,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는 기분이었다. 나는 개를 내세워 풍자하는 기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이었다. 삽화를 누구로 할까 고민했다. 동아일보의 권오철이 이일영이라는 화가를 소개했다. 키가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잘 생겼다. '또리'를 그렸는데 데생 실력이 대단했다. 곧 친해졌다. '5월의 꿈'을 쓰면서 한 해 전에 쓴 '아낌없이 주련다'의 각색까지 맡았다. 간신히 끝낸 뒤 이번에는 '빨간 마후라'의 각색에 매달렸다.

바빠 죽겠는데 최고회의 대변인 심범식씨가 찾아왔다. "이 양반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십니다. 선거 연설문을 하나 써주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어떻게? 정치를 알아야 쓰지요."

"그 어른의 뜻입니다. 다섯분을 지적하시더군요. 그중에 한선생이 들어있습니다."

'잘 살아보세' 때문인가. 옛날부터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 내 작품을 다 봤다는 뜻인가.

섣불리 정치판에 말려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다섯 사람에 내가 들어갔다는 것은 해석을 잘 해야 한다.

나는 반도호텔 스위트룸에 갇혔다. 드라마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내가 써준 글을 각각의 배역들이 최선을 다해 재현하는 것이다. 박정희라는 인물을 통해 국민에게 내 메시지를 전달하는 셈이 된다. 오 케이! 써보자!

"이 조그만 사람이 다시 나타나 죄송합니다.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으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생각해보니까 역시 정치는 정치하는 기술자들이 해야 되지 않나 여겼습니다. 혁명 동지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반발하기를 '야 너 목숨이 몇 개 있느냐. 사내 새끼들이 한번 칼을 뽑았으면 죽든지 살든지 결판을 내야 할 것 아니냐! 여기서 어떻게 우리가 물러나!' 그래서 여기 다시 나왔습니다."

그렇게 시작해봤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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