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누가되든 실리외교 틀 유지할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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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많은 언론 매체와 전문가들은 이번 러시아 대선을 개혁 대(對)보수의 대결로 보았다.
특히 서방측은 주가노프가 승리할 경우 대외 강경 노선을 취할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주된 쟁점은 러시아 국내 문제,그것도 경제 문제였다.선거 운동 기간중 외교정책이 쟁점화된 경우가 거의없을 정도로 국내 문제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이번 선거 결과를 통해 개혁 정책 추진 이후 러시아 사회의 분열 정도가 잘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분열은 러시아 외교 정책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다. 러시아 외교 정책은 국내 정치.경제적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특히 개혁에서 소외된 반(反)서구적 민족주의 세력의 입김은 앞으로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페레스트로이카 이래로 옛 소련의 외교 정책은 과거에 누렸던 강대국의 지위를 크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방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이 독립한 91년 이래 외교정책에는 초강대국 지위 상실로 큰 공백이 생겼다.특히 친서방 경향의 충격 요법에 따른 부작용으로 사회 분위기는 민족주의적.
내부지향적으로 변화했다.
이들 세력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대(對)서방 유연 외교를 비판하면서 민족 자존심 회복을 주장했다.이러한 분위기는 지난해 의회 선거를 전후해 한층 강화되었고 급기야 안드레이 코지레프 외무장관 사임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등장으로 표면 에 나타났다. 공산당과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의 자유민주당 등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구 확대 방안,한반도 4자회담에서의 러시아 소외를 들어 옐친 측에 반발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대통령에 누가 당선되든 외교 정책의 기본 노선은 「자존심 회복과 실리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보인다. 설령 겐나디 주가노프가 당선될 경우에도 지금까지의 보수적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기본 노선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요 지역별 외교 노선을 보면 가장 중요한 지역은 역시 「독립국가연합(CIS)」이다.옛 소련에 속했던 국가들과의 관계는 러시아 국내 정치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러시아는 급격한 연방 회복보다는 점진적 경제통합을 통해 결속을 강화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대서방 관계에서는 미국과의 핵무기 협상,NATO 확대 문제가주요 쟁점 사항이 될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문제에 관해 러시아는 이전보다 훨씬 고압적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특히 보리스 옐친 재선 이후 오히려 과거보다 강한 입장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대아시아 정책은 중국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큰 성과를보지 못했다.일본과의 영토 문제는 양국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고있으며 한반도에 있어서도 남북한 어느 쪽과도 긴밀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러시아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 원칙을 내세워 남한과의 밀월 시대를 마감했다.앞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에 참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가능한 경제적 이익을 챙기려 들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 상황에 좌우되면서도 과거의 향수에 빠져 있는 러시아를대해야하는 우리의 대응은 쉽지 않다.
명분과 실리를 조화시키면서 동시에 러시아의 새로운 역할과 변화하는 외교정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용출<서울대 외교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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