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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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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지수의 오르내림에 자금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증권사 지점장은 현대판 ‘줄타기 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려한 몸놀림으로 관중의 박수를 한 몸에 받지만 줄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증시 침체기에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최전선에 있는 증권사 지점장들의 애환(哀歡)을 들어봤다.


▶끊임없이 고객을 상대하는 증권사 지점장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했다.

강동구의 한 증권사 M 지점장은 토요일 아침마다 한강으로 향한다. 반포에서 양화대교까지 세 시간 정도 ‘느리게 걷기’를 하기 위해서다.

M 지점장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며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이 일을 못한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실적에 대한 부담감, 고객과의 갈등, 자괴감과 짜증을 모두 흘려 보내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는 “과거 상사였던 지점장이 성경, 불경에 코란, 원불교 경전, 달라이 라마까지 보는 게 우스웠는데 이제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 금융시장이 위축되면서 증권사 지점장의 고뇌도 깊어지고 있다. 흘러내리는 지수에 직원들의 사기까지 떨어져 크든 작든 한 지점의 수장으로서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숨만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죠.”

고급 정장을 입고 안락한 소파에 앉아 도살장에서나 들릴 법한 잔혹한 말을 내뱉은 이는 대형 증권사 K 지점장이다. 고객들이 손실을 입어 괴롭겠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돌아온 답이다. 특히 대출 받아 투자한 고객 앞에서는 ‘죽을 맛’이라며 주가를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대책이 없다고 했다.

그는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에는 전화 한 통 안 하고 판매한 증권사에만 문의가 빗발친다”며 “얼마 전에도 M 증권사의 특정 펀드가 수익률이 곤두박질쳐 곤욕을 치렀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남에 있는 한 증권사의 C 지점장은 매일 아침 7시 출근하자마자 PC 모니터를 본다. 본사에서 그날그날 ‘하달’하는 목표 달성률을 확인해야 자극을 받아 더 치열하게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지점 실적이 좋아 더 높은 영업목표를 할당 받았다”며 “달성률은 작년 동기 대비 눈에 띄게 낮아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 지점은 자산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있어 예탁금 유치에 대한 부담은 덜하다. 하지만 수익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절대 손실 규모가 다른 곳보다 훨씬 커 힘들다고 했다. 돈이 안 모이는 곳은 돈이 안 모여 걱정이고, 돈이 모이는 곳은 또 모이는 대로 운영이 어려운 것이다.

지점장은 지점의 흥망을 떠안은 책임감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마음대로 털어놓지도 못한다. M 지점장은 “장이 좋을 때는 본부 회의가 끝나고 자연스레 2차도 가고, 폭탄주도 마셨는데 요즘은 누가 말 안 해도 호프 한잔하고 헤어진다”며 “서로 괴롭기도 하고 괜히 소문날까 쉬쉬하지만 아마 지점의 80%가 앞이 안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력 관리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지점 손익을 맞추려면 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주로 쥐어짜는 항목이 인건비다. K 지점장은 “최소 인건비의 4배에 달하는 수익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증권사는 본사 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덜하지만, 중소 증권사 지점장은 직원들 ‘스터디’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뿐 아니다. 직원이 사고를 내거나, 수익을 맞추려고 직접 투자하다 큰 손실이라도 입으면 법적인 의무가 없다 해도 상사로서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고충 탓에 직장을 그만두는 직원도 많다. M 지점장은 “동기가 스물셋인데 7명 남았다.

한 친구는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더라”고 허탈해 했다. 지점 실적이 안 좋으면 지점장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C 지점장은 “회사마다 1년에 한 번씩 실적이 안 좋은 지점장을 보직해임 하거나 좌천시키는데 그 비율이 열에 한 명 정도”라고 알려줬다.

이들에게 아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증권사는 여전히 대학생이 선망하는 직장에 속한다. 다른 업계보다 보수가 높고 자본시장통합법 실행을 앞두고 증권사의 업무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계의 ‘큰손’을 만날 수 있다는 ‘고급 인맥’에 대한 동경도 한몫한다.

지점 실적 안 좋으면 바로 ‘아웃’

현실에서도 증권사 지점장은 영업 실적만 좋으면 억대 연봉은 물론 초고속 승진에 최상위의 삶을 누릴 수 있다.

한 30대 지점장은 “처음 발령났을 때 솔직히 ‘이 맛에 증권사 다니는구나’싶은 생각도 들었다”며 “은행에서는 과장 정도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외줄에서 떨어지는 것도 한순간이지만 훌쩍 재주를 넘어 자본시장의 주역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의 직업이다.

더욱이 요즘은 ‘투자는 내 판단’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아 무턱대고 ‘내 돈 내놔라’는 고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90년대만 해도 소액 투자자들이 떼를 지어 증권사에 몰려다니며 소파를 집어 던지거나 식칼을 들고 찾아와 지점장에게 ‘같이 죽자’고 협박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투자자의 욕설 전화에 여직원이 울기도 하고, 지점장들 사이에서 아직도 집 안 팔았느냐는 말이 우습지 않은 우스갯소리로 돌기도 했다.

고객의 항의에 집을 팔아서 손실금을 보상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는 증권사 직원이라고 하면 은행에서 대출도 잘 안 해줬다. 그래서 증권사에 취직한다고 하면 부모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렸다.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는 지점장도 있었다고 하니 요즘처럼 매일 똑같은 시간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압박하는 것은 협박 수준에도 못 들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증권사 지점장을 괴롭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숫자’다. 업무도 과거보다 복잡해졌다.

증권 브로커리지보다 자산관리에 중심을 두는 증권사 지점장들은 “예전에는 주가 하나만 보면 됐는데 요즘엔 상품 교육, 마케팅 등 신경 써야 할 게 훨씬 많다”고 토로했다. M 지점장은 “요즘 고객들은 ‘어떤 종목을 사야 하느냐?’가 아닌 ‘오바마가 당선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식으로 물어보기 때문에 단편적인 금융 지식으로는 고객을 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점에서 본사로 자리를 옮긴 한 전직 지점장은 “할아버지·할머니들만 앉아 있는 객장을 보고 있으면 고객에게 변명만 늘어놓는 소심한 지점장으로 직장생활을 마칠 것 같아 솔직히 두렵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큰 포부를 갖고 입사했는데 시장에 맞춰 돌아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한계에 달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K 지점장도 “고객과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인간적인 모멸감이 들었지만, 자괴감이 더 컸다”고 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요즘도 전세 사는 지점장이 많긴 하지만, 내 재산부터 챙겨야 한다는 학습효과 때문에 일부러 재산을 부인이나 가족 이름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여의도는 자축을 벌이는 증권가 사람들로 룸살롱 촌을 형성할 정도였고, 2000년 벤처 붐 때도 연일 샴페인이 터졌지만, 요즘은 언제 미끄러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룸살롱도 한산하다”고 여의도 분위기를 전했다.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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