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도 투자도 서울서 승부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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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박경용(48)씨는 충북 청원군 소속 6급 공무원이다. 하지만 서울에 살고 있다. 근무지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 트라팰리스에 있는 ‘청원군 서울사무소’다. 2일 오전 9시, 사무소장인 박씨는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로 향했다. 현안 사업을 행정안전부에 제출하기 위해서다. 이어 여의도 국회로 건너가 서울에 주재하는 지방 신문의 기자들을 만났다. 국회 분위기도 파악하고 정보를 얻는 데 기자들만큼 중요한 정보원이 없기 때문이다. 충북 출신 국회의원의 보좌관도 만나 협조를 구했다. 오후에는 오창읍에서 상경한 동료 직원들과 동작·영등포구에서 ‘푸른 청원 생명축제’ 홍보 활동을 벌였다. 3일엔 정부 과천청사의 기획재정부를 방문, 예산 협조를 요청할 예정이다. 박 소장은 매일 이런 자신의 활동을 전자문서로 작성해 군청에 보고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서울사무소를 두고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예산 확보와 지역 홍보 등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방교부세나 도로 건설 등에 드는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고, 서울 시민들을 지역 축제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서울로 갈 수밖에 없다”=현재 16개 광역 자치단체 중 서울과 인천을 제외한 14개 시·도가 서울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대부분 서기관급 소장을 비롯해 10명 내외의 직원이 일한다. 시·도에서는 사무실과 직원 숙소 등에 연간 2억~3억원 이상의 예산을 쓰고 있다.

충남도의 경우 서울 서초구 염곡동에 투자통상지원사무소를 두고 있다. 라창호 소장을 비롯해 9명이 근무한다. 예산 확보, 정부 부처와의 협조, 국내외 투자 유치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충남 서울사무소는 미국 A기업과의 투자 유치 문제를 논의 중이다. 2억5000만 달러(약 2500억원) 규모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건이다.

최수영(43) 강원도 서울사무소장은 “정부 부처, 국회 등 예산 관련 부서가 모두 서울에 있어 서울사무소를 둘 수밖에 없다”며 “지자체들의 서울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

기초자치단체의 서울사무소는 2000년 이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강원도 평창군을 비롯해 전북 남원·무주·고창·익산, 전남 무안·영암·여수·강진, 충북 충주·제천·음성·영동, 충남 아산·논산·보령·공주, 경북 구미·김천·상주, 경남 양산 등 32개 시·군이 서울사무소를 두고 있다. 광역 시·도에 비해 재정·인력이 열악해 보통 1~2명이 파견 형식으로 근무한다.

서울에 올라와 있는 32개 기초단체는 7월 ‘전국기초자치단체 서울사무소 연합회(전서연)’를 만들었다. 정보도 교류하고 예산을 따낼 때 불필요한 경쟁을 없애기 위해서다. 전서연 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대 전남 영암 서울사무소장은 “예산 낭비라는 지적도 있지만 ‘고(Go) 서울’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예산 따내기부터 의전까지=지자체의 서울사무소는 정부 부처, 국회를 상대로 예산을 따내는 일을 한다. 박 소장은 지난해 균특사업평가사업비 7억원, 지방재정분석평가사업비 2억원, 간판시범거리조성사업비 3억원 등 12억원의 예산을 추가로 확보했다. 현대·롯데백화점, 농협하나로마트·신세계이마트 등 서울 지역 14개 백화점, 대형 마트에 청원 생명 쌀 입점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홍보판촉전이나 지역 특산물 판매 행사도 조정한다. 도지사와 시장·군수가 서울에 올라오면 의전도 맡는다. 신준희 보령시장은 “서울 한복판에 보령시청이 하나 더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을 요청하는 ‘을(乙)’의 입장에 있는 직원들이 겪는 애환도 없지 않다. 정부 부처나 국회를 방문해도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라고 한다. 김기태(43) 보령 서울사무소장은 “시장·군수들도 정부 부처의 4~5급 공무원을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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