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어르신들 역사다큐 만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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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안산 은빛둥지 소속 노인들이 시사회 성공을 자축하고 있다. 오른쪽 위 사진은 염석주 선생. [사진=정영진 기자]

98년 전 국권을 빼앗겼던 국치일인 지난달 29일 오후 7시. 경기도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국제회의실에선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됐다. 프로 영화인들이 만든 매끈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50분간의 상영이 끝난 뒤 200여 좌석을 메운 관객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작품의 이름은 ‘염석주를 찾아서’. 안산 출신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염석주 선생(1895∼1944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다. 염 선생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1909∼35년)을 물질적으로 후원한 인물로, 만주로 건너가 300만㎡ 규모의 농장을 개발해 독립군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해방 직전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모진 고문 끝에 숨졌다. 그러나 증빙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이들은 안산시 본오동 노인평생교육원 은빛둥지 소속 60∼80대 노인 18명. 이들은 작품 기획은 물론 촬영·편집·내레이션 등 제작 과정 일체를 직접 담당했다. 안산 YMCA 김종천 미디어팀장은 “완성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노인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06년 9월. 은빛둥지에서 동영상 제작 기법을 배운 이들은 어린 시절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염 선생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기획했다. 제작단장 강희정(79) 할머니는 “안산의 훌륭한 독립운동가인 염 선생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 너무 안타까워 그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캠코더 5대를 들고 국회 도서관과 국가기록보관소 등 전국을 돌며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국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염 선생의 아들과 딸 등 직계가족을 찾아내 증언도 들었다. 그의 사회활동을 다룬 일제시대 신문기사와 염 선생을 ‘고등계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기록한 일본 경찰의 내부 문서와 사진도 확보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염 선생이 운영했던 ‘추공농장’을 찾기 위해 만주 일대 1400㎞를 돌아다닌 끝에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곳에서 염 선생이 군량미를 지원했던 대한통군부 사령관 김창환 선생의 며느리 황명수씨를 만나기도 했다. 중국에서 60분 분량 6㎜ 테이프 80개 분량을 촬영했고, 100여 명이 넘는 인물을 만나 인터뷰했다. 조경숙(80) 할머니는 “잠자리와 먹거리 등 모든 것이 불편한 오지를 돌며 증언자를 찾던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제작비 1500만원은 노인들의 쌈짓돈과 은빛둥지 라영수(69) 원장이 틈틈이 외부에 동영상 강의를 다니며 받은 강사료로 충당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총감독한 라 원장은 “이번 작품을 국가보훈처에 보내 염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도록 요청하고, CD에 담아 도내 일선 학교에 보내 교육용으로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은빛둥지는 후속 작품으로 염 선생을 일제에 밀고해 숨지도록 만들고도 독립유공자로 등재된 가명 ‘이배신’을 주제로 한 ‘배신의 시대’란 작품을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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