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머니 트레인’은 오바마 향해 달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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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07면

‘월스트리트 선거자금’. 미국 정치권력과 금융권력의 이종교배가 이뤄지는 채널이다. 19세기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월스트리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공화당 윌리엄 매킨리 후보와 치열하게 선거전을 치르면서 양쪽의 커넥션을 “인간을 짓누르는 황금의 십자가”라며 “부숴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과는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매킨리가 승리했다. 그 이후 100여 년이 흘렀다. 양쪽의 유착에 대한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가 훨씬 강한 듯하다. 월스트리트가 지원한 선거자금이 대선 결과를 시사하는 풍향계로 인식되기도 한다.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최근 ‘월스트리트 머니 트레인(Money Train·현금 수송 열차)’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포착됐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와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 진영이 선거자금 내역을 연방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덕분이다. 월스트리트 거대 금융회사들의 베팅 내용이 드러나자 월스트리트 안팎이 술렁이고 있다. 마치 판도라 상자가 열린 듯하다.
 
투자은행=권력의 풍향계

월스트리트에서 권력에 가장 민감한 회사들이 바로 투자은행들이다. 시중은행과 달리 각국 정부나 왕의 자금을 관리·운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 정부가 규제의 칼날을 서슬퍼렇게 벼리고 있다. 중앙은행에서 급전까지 빌려 쓰는 처지가 돼 시중은행처럼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다음 백악관 주인과 직·간접적인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처지에 놓인 투자은행들은 이번 대선에서 역설적으로 월스트리트 규제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는 오바마 쪽에 줄을 섰다. 지난해 예비선거 때부터 올 7월 말까지 JP모건·골드먼삭스·메릴린치 등 주요 투자은행은 법인과 임직원 명의로 오바마에게 253만 달러를 줬다. 매케인에게 준 돈은 173만 달러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재무장관과 백악관 비서실장을 배출한 골드먼삭스는 오바마에게 65만3000달러를 기부했다. 반면 매케인에게는 3분의 1도 안 되는 20만3000달러를 건넸다. 2004년 대선 때는 현 대통령인 공화당 조지 부시 후보와 민주당 존 케리 후보 진영에 각각 39만 달러와 30만 달러를 줘 그런대로 균형을 유지했지만 이번엔 차별을 뒀다.

JP모건은 오바마에게 41만4000달러를, 매케인에게 17만9000달러를 각각 줬다. 이 투자은행도 2004년 대선 때는 케리(20만7000달러)와 부시(20만5000달러) 간 균형을 유지했었다. 심지어 현금 부족이 심각하다는 소문이 무성한 리먼브러더스도 매케인(11만 달러)보다 오바마(36만 달러)에게 더 많이 줬다. 매케인 진영에 더 많이 베팅한 투자은행은 한국투자공사(KIC)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메릴린치와 크레디스위스 정도다.

『미국 탕진하기(The Squandering of America)』의 저자 로버트 커트너는 “올 대선 선거자금에서 투자은행의 생존을 뛰어넘는 확장 본능이 엿보인다”며 “새롭게 짜일 금융 법규에 자신의 이익을 담으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펀드는 오바마, 보험은 매케인

권력의 풍향계인 투자은행의 선거자금 지원 행태에 불만인 듯 최근 매케인은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월스트리트가 술(버블 심리)에 취한 상태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외신들은 매케인이 마음 속에 쌓인 서운함과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고 촌평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매케인은 투자은행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의 시중은행·보험회사·헤지펀드·사모펀드에서 모금 선거자금에서도 오바마에게 뒤져 있다. 1172만 달러(오바마) 대 995만 달러(매케인). 겨우 위안을 삼을 대목을 찾는다면 군소 은행과 보험회사들에선 오바마보다 더 많은 돈을 거둬들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두 업종이 전통적으로 공화당 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의미가 반감된다.

결국 투자은행을 포함한 월스트리트 전체 판세는 1427만 달러 대 1168만 달러로 오바마가 판정승을 거둔 양상이다. 하지만 4년 전에는 달랐다. 공화당 후보인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이 월스트리트에서 2067만 달러를 모금해 존 케리 당시 민주당 후보(803만 달러)의 두 배를 모았다. 올해 대선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속단하기 이르지만 초반 기선은 오바마가 잡은 셈이다.
 
전체 선거자금 판세는

오바마는 머니 센터(Money Center)인 월스트리트에서 기선을 잡은 덕분인지 전체 선거자금 모금액에서 매케인의 두 배 이상 많은 돈을 거둬들였다. 대선 본게임에 앞서 ‘전(錢)의 전쟁’에서 더블 스코어를 기록한 셈이다. 더 많은 선거자금을 모금한 쪽이 승자가 될 확률이 크다는 과거 미 대선 흐름에 비춰볼 때 일단 오바마가 백악관에 몇 걸음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

그러나 올 들어 두 진영의 월별 모금액 추이를 보면 아직 결론짓기에는 이르다. 매케인의 모금액이 1월 800만 달러에서 7월 2000만 달러로 꾸준히 늘어난 반면, 오바마의 월별 모금액은 850만~2500만 달러 사이에서 등락이 심하다. 추이만 놓고 볼 때 매케인의 꾸준한 뒷심이 느껴진다. 더욱이 두 사람의 지지율 차이가 좁혀지기 시작한 7월 모금액은 2050만 달러(오바마) 대 2030만 달러(매케인)로 엇비슷해졌다. 두 진영이 전당대회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가늠하기 힘든 흐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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