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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파병은 이승만이 약속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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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박정희는 1964년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월남전에 파병한다. 그리고 44년이 흘렀다.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떠나 파병으로 한국 경제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도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이번 호부터는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을 연재한다. 다만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린다.


건국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삼아야 하는가의 논란처럼, 건국 60주년의 실질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3년 3월 월남전에서 귀국한 국군장병을 사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건국 후 해외 전장에 장병을 파병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가 처음이었고, 파병의 성격을 규정할 때 6·25 참전에 대한 보은과 자유우방 지원, 북한 도발 억제와 국방력 향상이었다.

이와 함께 경제부흥의 발판 마련이라고 했던 만큼 건국 60주년의 의미 속에 월남파병은 분명한 하나의 획을 긋는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1965년 2월 사이공 정부를 돕기 위해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은 약 10년에 걸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커다란 경제적 변화를 끼쳤다.

그중에 특히 한국은 ‘월남특수’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면서 경제재건의 실탄을 마련하고 ‘한진’이라는 이름 없던 작은 수송업체와 극동, 삼환, 대림, 현대건설 등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해 준 게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말이다.

1966년 일본 외무성 경제국이 발표한 ‘베트남 평화의 경제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필리핀, 한국 등이 베트남 전쟁으로 GNP가 평균 3% 증가했다.

69년에 발행된 ‘이코노믹 리포트 오브 프레지던트’는 미국의 특별비 예산이 65년 1억 달러였던 게 1년 만에 58억 달러, 4년 후에는 257억 달러로 급팽창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의 특별비가 대부분 전쟁 비용으로 사용된 것이겠지만 필연적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간접비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경제 측면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뿐 아니라 세계 전역을 변화시켰다.

차지철 의원의 ‘반대 쇼’

실제로 태국 같은 나라는 아시아권에서 최대의 경제적 수혜국이 됐다. 태국은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전략기지를 제공하면서 반대급부로 상당한 원조를 받아 사회간접시설 정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기지 사용에 따른 비행장, 항만 등 미군을 위한 위탁시설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건설 수요를 일으켰다. 한국이 최초로 해외건설에 뛰어들어 태국에서 수주했던 현대건설의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 바로 미국 원조 자금이었다.

물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필적하는 근대화 무기와 5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투입하면서도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나고 여론이 악화되자 인도차이나반도에 국한된 지역전쟁으로 성격을 축소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예산지출로 재정적자, 인플레, 국제수지 악화, 달러가치 하락 등이 겹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 국내 정치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은 경기가 호전되면서 집집마다 TV수상기가 보이고, 님은 먼 곳에 가 있지만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하이힐을 사 신고, 미장원이 성업했다. 춤바람이 사회문제화하기도 했으나 ‘내 집 마련’이라는 관심사가 그때부터 국민 사이에 회자하기 시작할 만큼 ‘월남 달러’ 덕을 톡톡히 누렸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반면 1955년 10월 유엔 UNKRA(한국재건위원회) 특별조사단장인 메논이 ‘한국에서 경제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보고서를 쓴 것은 경제적 비아냥거림이었다.

메논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유엔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특별조사단이 내한했던 그 무렵의 실질적인 GNP는 60달러 언저리로 세계 최빈국 상황이었다. 6·25 이후 생산시설 파괴로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할 정도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외환보유액도 2300만 달러 정도였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위해 입국하는 한국인들에게 억지에 가까운 온갖 비용을 뜯어낼 정도로 추락한 필리핀이지만 55년 무렵만 해도 한국은 필리핀보다 훨씬 못했고 북한도 한국을 앞서고 있었다. 북한은 남침을 계획하면서도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를 진행시켜 60년 초반에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할 정도였다.

한국도 이승만 정권 때부터 경제개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으니까 시점으로 보면 북한은 한국보다 10년 앞서 경제개발에 관심을 기울였던 셈이다.

어쨌든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외자 도입으로 산업화를 이룬다는 것이 핵심이었던 만큼 위험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외자 도입은 해외의 돈을 국내로 가져와 국내 통화량을 증가시키고 결국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통화 증가만큼의 경제성장을 해야 하고 실질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최빈국 경제개혁은 위험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필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월남파병은 외화 획득의 절대적 기회가 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은 박정희가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정치권의 논란이 가열됐지만 추진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1968년 채명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월남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는 3차 파병안 논의는 집권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부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다. 의원총회에서였다.

“나는 여당의원이지만 3차 파병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된다면 분명히 반대할 것입니다. 월남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전부 자기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난시켜 놓고 군대조차 보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 놓고 원군요청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 나라 특권층 자식들부터 전선에 서게 한 뒤에 외국에 파병을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자기 자식들은 안전지대에서 향락을 즐기게 해 놓고 우리나라 청년들을 나서게 한단 말입니까? 상정 자체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공화당 소장파를 대변하는 국회 국방위 소속 차지철 의원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측근인 차 의원이 공개적으로 파병을 반대한 것은 박 대통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미국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쇼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1964년 9월 22일 140명으로 편성된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제1차 월남파병, 그리고 65년 2월의 공병과 수송부대 2000명 파견까지는 그나마 묵인이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0월에 파병될 대규모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파병을 앞두고 3차 파병 논의는 이처럼 집권당 내부에서부터 진통이었고, 야당인 민사당의 서민호 의원은 더 극렬한 저지를 선언했다.

“누구를 위한 파병인가. 미국을 위한 파병인가, 월남을 위한 파병인가. 박정희 정권은 고귀한 젊은 청년들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야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은 이미 이동원 외무장관과 주한 미국 대사 브라운 사이에 이른바 ‘브라운 각서’가 교환돼 머지않아 한국 물자와 한국 민간업체들이 대거 월남으로 진출한다는 스케줄이 구체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비밀이 없는 일기장이라고도 했지만 전 주월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비화를 공개했다.

“박 대통령 때 파월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그 전에, 이승만 대통령 때 이미 파월 문제가 있었습니다.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지요. 그때 벌써 미국은 월남에 일부 특수부대 요원을 투입하고 아주 극히 부분적이지만 개입을 하고 있었는데, 고딘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전투 경험이 많고 게릴라전 경험이 있는 한국의 지휘관급과 전투부대를 보내줄 수 없느냐고 요청을 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오케이를 했다고요. 그래서 보낸다면 육군에서는 저를 보내야겠다는 논의를 마친 상황이었어요. 그때 내가 육군본부 작전과장을 거쳐 5사단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5·16이 나서 유야무야 되는가 했더니 당시 참모총장 김종오 장군이 나를 불러요. 고딘 대통령과 이 대통령이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채 장군이 가야 될 것 같다고 말이죠. 그런 비화가 있었다고요.”

월남 파병은 박 대통령 때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월남 측과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용태 의원과 정보부 차장보였던 석정선씨가 극비리에 월남을 방문해 파병에 따른 구체적인 협의를 가졌다는 증언에서 입증되고 있다.

월남 파병은 경제적 실리를 최우선으로 했던 박 대통령에게 누가 가장 적합한 논리와 명분을 제공하느냐는 것이 핵심이었다. 명분과 논리가 정연해야 박 대통령이 반대로 들끓는 정치권을 잠재우고 국민 설득에 나설 수 있었다.

여기에 총대를 메는 것이 이동원 외무장관이었다. 이 장관은 사실상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고 젊은 나이에 입각했지만 파병 문제도 해볼 만하다는 논리로 박 대통령의 환심을 산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이 장관은 65년 2월 27일 ‘플레이쿠’ 미군기지가 베트콩에게 피습 당하면서 미군이 보복적인 월맹 폭격을 가속화하고, 동시에 월남 후방 복구를 위해 한국 건설업체들이 대거 진출할 수 있다는 점도 활용했다.

분명히 파병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박 대통령이 구상하는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멍청하게 문제점을 나열할 장관은 없었다. 이 장관도 ‘문제점은 말씀을 안 드리는 거지’ 하고 웃었지만 평소 개구쟁이처럼 능글맞았던 이 장관의 스타일일 수도 있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사실 이건 중요했다고요. 첫째는 전투병력을 파병하면 국제정치적으로 손해를 본다, 왜 손해를 보느냐, 월남전이 인기 없는 전쟁이었어요. 비교적 미국의 고독한 전쟁이었고. 한국전쟁만 하더라도 유엔 이름 가지고 전부 미국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월남전은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전쟁이고 유럽 국가들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인기가 없었고 미국 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저렇게 인기 없는 전쟁에 한국이 끼어들어 도와주면 그렇지 않아도 우리조차 인기가 없는데 우리의 인기가 더 떨어질 거다. 다시 말해 피 팔아 먹는다, 생명을 팔아 먹는다 하는 이런 잘못된 이미지를 줄 수 있다, 그게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는 점이지요.

“월남전은 인기 없는 전쟁”

두 번째는 전장에 나갈 바엔 이기는 전장에 들어가서 편을 들어줘야 나중에 득이 있습니다. 지는 전쟁은 편을 들어줘 봤자 별로 득도 없고 빛도 나지 않아요. 월남 전쟁은 지는 전쟁인지 이기는 전쟁인지 모르겠지만 이기는 전쟁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아주 제한된 전쟁이었고, 명분도 확실하지 않은 전쟁이었고, 미국에서 뒷받침하는 여론부터 분열이 되어 있었고, 국제적으로 아주 고독했고. 그러니까 저 전쟁은 승리하기 어려운데 거기에 끼어들어 나중에 같이 쫓겨날 생각을 하니까 아찔하대. 그런데도 그런 얘기는 싹 빼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파월을 해야 됩니다, 이런 말씀만 드리는 거지, 하하하.”

-박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박 대통령이 참 고상하고 순진하신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란 고상한 것만 가지고는 존속할 수가 없죠. 이건 특히 내 아이디어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이용했듯이 우리가 월남전쟁을 잘 이용해가지고 우리 경제를 부흥시키자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몇 번 그러시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그런 분입니다. 아주 대국적인데 상당히 순진하고 고상한 데가 있어요. 그러면서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미국이 지금 외롭게 반공전쟁을 하는 것 아니냐, 한국전쟁이 났을 때도 그래서 도와준 건데 우리도 의리를 지켜서 외로울 때 도와줘야지 경제적 실리를 챙기려고 파병한다 하면 너무 야박하지 않느냐고, 그런 말씀이에요. 어쩌면 박 대통령은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의리를 얘기하셨겠지만 나는 외무장관이니까, 외무장관은 항상 실리를 따라야 돼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한테, 고상한 것도 좋습니다만 파병에는 실리가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을 드렸지요. 한참 듣고 계시더니 그럼 실리를 어떻게 챙기겠다는 거냐고,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시데요? 그건 저한테 맡기십시오 그랬지.”<계속>

이호 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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