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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영웅 만들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세기 미국 작가 스티븐 크레인의 소설 『붉은 무공훈장(Red Badge of Courage)』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영웅과는 거리가 먼 젊은이였다.남북전쟁에 참가한 것도 본인의 적극적인 소신과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다른 젊은이로 바뀌어졌다.일진일퇴(一進一退)의 백병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젊은이는,첫 전투에 나서는 보통의 다른 어린 병사와 마찬가지로,제정신이 아니었다.수많은 동료가 죽어가는 극도의 혼란속에서 그 의 손에는 어떤 경위에서였는지 부대의 깃발이 쥐어져 있었다.그는 뚜렷한 의도도 없이 깃발을 휘날리며 앞으로 내달렸다.빗발치는 총알속을뚫고 돌진하는 그의 행동은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었고 그는 위대한 영웅이 돼 있었다.
20대에 요절한 작가 크레인은 전쟁과 폭력의 허망함과 무의미를 좀더 극적으로 고발하기 위해 영웅의 탄생을 과도하다 할 정도의 우연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번주 미국에서 한명의 영웅이 탄생했다.지난 21일 워싱턴 내셔널 성당에서는 특별한 영결식이 엄수됐다.백색 예복을 차려입은 해군장병 수천명과 3부요인들이 만장한 장엄한 예식이었다.지난주 세상을 떠난 해군참모총장 제러미 보더 제독( 提督)의 장례식이었다.그러나 그의 죽음은 전형적인 군인의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다.가슴에 달고 다니던 훈장중 일부는 그가 패용할 자격이 없는 것이라는 언론의 추적에 대해 권총자살이라는 처참한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장례는 자살이라는 표현을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오히려위대한 영웅에게 바치는 예식이었다.클린턴 대통령부처도 국회의장.장관들과 함께 조객으로 참석했다.클린턴 대통령은 고인에 대한추도사에서 그가 『미국 해군과 조국의 가슴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 특별한 인물』이라고 칭송하고,특히 『명예를 특별히 존중하는 군인이며 그의 명예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죽음을 택하게 만든 훈장은 그가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니던 여러개중 2개였다.월남전때 그는 한 전투작전에 투입되긴 했지만 줄곧 해안에 정박한 배에서 근무한 것으로 돼 있다.문제가된 훈장은 규정상으로는 「직접적 전투 참여」의 경우에나 패용할수 있다는게 논란의 발단이다.
나폴레옹은 남자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하잘 것없는 장식(裝飾)」이라고 했고 1,2차 세계대전의 미국 영웅 패튼장군은 『나는 무공훈장을 탄 소위가 되면 됐지,그것도 없는 장군은 되고싶지 않다』고 말했다.나폴레옹이나 패튼이 강조한 훈장의 영예에집착한 것이 보더 제독 자살의 진정한 배경인지는 본인의 실토가없는한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월남전 기간중 함상근무로 비록 표창을 받았지만 그 표창은 훈장패용까지는 허용되지 않는다는게 규정이며,그위반 사실을 추궁하려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후 그는 죽음을 택한것이다.다시 말하자면 그는 훈장에 집착했다기 보다는,비록 위반한 규칙이지만 그 규칙에 집착한 나머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위반행위에 대한 원상복구조치를 취한 셈이다.
규칙에 대한 집착은 훈장패용의 타당성을 추적한 언론도 마찬가지다.보더 제독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뉴스위크지 편집장은 어느 누구든 그가 자신의 과거역사라고 제시하는 대목의 진위(眞僞)에대해 질문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게 아니라고 말 했고 이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한 군인의 가슴에 달린 훈장 한,두개의 진위는 별로 대수로운게 아닐 수도 있다.최소한 목숨이 왔다갔다 할 문제는 아니다.
보더 제독의 자살은 어처구니 없는 참사지만 작은 법규도 중시하는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많 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다.아울러 당혹스런 상황을 그의 영웅만들기로극복하고 넘어가는 그들의 금도(襟度)도 주목된다.
(美洲총국장) 한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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