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암자로가는길>강원도 인제 봉정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가 봉정암(鳳頂庵)이다.해발 1천2백44로 5월 하순에도 설화(雪花)를 볼 수 있는 암자다.가는 길은 그야말로 극기 훈련과 다름없다.6시간의 산행은 기본이고 산비탈에 설치된 로프를 잡고 십수 번의 곡예를반복해야 한다.더구나 해발 7백를 넘어서면 기상대의 예보는 쓸모없게 된다.예보를 비웃듯 수시로 날씨가 바뀌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해발 1천를 넘어서자 갑자기 천둥이 치면서 곧비가 내린다.오세암의 한 스님이 우비(雨備)를 한사코 가져가라해서 챙기고 올랐는데 비 오는 산중에서는 우비가 바로 관세음보살임을 깨닫는다.스님이 우비를 챙겨주지 않았더 라면 하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 서늘해진다.
이제 오르기가 가장 힘들다는 깔딱고개다.누구든 평등하게 두 발과 두 손까지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바윗길인 것이다.봉정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구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시창( 始創)했다는것이 정설이다.그후 원효대사와 고려 때는 보조(普照)국사가,조선 때는 환적(幻寂)스님과 설정(雪淨)스님이 쓰러진 암자를 다시 중창했던 것이고.
그런데 암자 역사에 있어서 징검다리같은 위의 다섯분만을 기억해선 안된다.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처럼 흔적없이 스쳐간 수많은 스님들이 암자를 지켜왔기 때문이다.법정(法頂)스님께서 들려준 이야기인데 봉정암에는 몇십년 전만 해도 이런 무언(無言)의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겨울철 전에 암자를 내려가는 스님은 빈 암자에 땔감과 반찬거리를 해놓고 하산을 하고,또 암자를 찾아가는 스님은 한 철 먹을 양식만을 등에 지고 올라가 수행했다는 것이다.
암자의 법당인 적멸보궁에는 일반 법당과 달리 불상(佛像)이 없다.산정의 오층석탑에 불사리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니 참례하는 이는 나그네만이 아니다.산봉우리에 솟구친 거대한바위들은 천년을 하루같이 탑을 향해 참례하고 있 는 것이다.
정념(正念)스님은 까마귀 소리를 듣고는 누군가가 온 줄 알았다고 말한다.암자 주위에 사는 까마귀들에게 눈이 쌓여 먹이가 떨어지는 겨울철에는 아침 끼니마다 밥을 줘왔는데 이제는 까마귀들이 밥값을 한다는 것이다.등산객들이 오면 한두 번 울고 말지만 스님이나 신도들이 올라오면 계속 『깍깍』 짖어댄다는 것이다.까마귀한테도 불성(佛性)이 있는 것일까.
글=정찬주(소설가) 사진=김홍희(사진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