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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딜레마' 어떻게 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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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라크 사태가 악화하자 미국은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 전쟁에는 승리했으나 민주국가 건설에는 정파들 간의 분열로 인해 난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이라크는 새 정부 수립이라는 난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다.

지난해 4월 9일 후세인 독재가 붕괴한 지 1년이 된 오늘 이라크에서는 미군 점령에 대한 반란이 격화하고 있다. 특히 팔루자에서 수니파 반군이 4명의 미국 민간인을 살해한 뒤 그 시체를 끌고 다닌 사건이 일어나자 미 해병대는 이곳을 봉쇄했고 그 결과 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 베트남 전쟁과 다른 현상들

남부의 나자프에서는 시아파의 젊은 성직자 알사드르가 이끄는 민병대들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미군은 그의 생포 또는 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와중에서 무장집단들은 현지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납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미국의 케네디 상원의원은 이라크에서 미국은 1960년대의 베트남과 같이 진흙탕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물론 이라크는 베트남과는 다르다. 전 인구의 60%인 시아파의 대다수는 미군을 자기들에게 자유를 제공한 해방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아직도 3대 종파, 즉 시아파.수니파.쿠르드족 간 내전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군의 수는 5만명을 초과했으나 이라크에서는 700여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라크에서도 국민이 지지하는 정부가 구성돼야만 미국의 목표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미국이 6월 30일까지 이라크에 주권을 이양하겠다는 계획이 잘 실현될 것인지 의문시된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4월 13일 기자회견에서 주권이양을 예정대로 실시하고 치안회복을 위해 미군도 증파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도 미군 철수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새 정부 수립과 부흥을 위해서는 유엔과 기타 국가들의 폭넓은 참여를, 그리고 민주주의보다는 안정을 더욱 강조하면서 부시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라크 사태는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를 좌우하게 되었다.

이라크 사태의 악화는 거기에 파병하고 있는 국가들의 국내정치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야당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00여명의 자위대 파견을 결정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가 당면하고 있는 처지가 그 한 예다. 7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그는 무장집단이 자위대 철군을 요구하면서 일본 민간인들을 납치하자 고이즈미 총리는 테러행동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건에서 이탈리아 정부도 철군을 거부하자 납치범들은 한명의 이탈리아인을 살해했다. 그런데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철군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 스페인의 새 정부가 신속하게 군대 철수를 발표하자 기타 파병국들의 태도는 동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7월 1일 이후에 이라크는 어떻게 될 것인가가 문제다. 우선 누가 주권을 수용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유엔특사 라크다르 브라히미는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과도정부와는 달리 유엔이 임명하는 새 과도정부가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4월 16일 부시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회담한 뒤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비록 이것이 실현되더라도 치안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과연 2005년 1월까지 헌법 제정과 선거가 실시될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결국 상당 기간 주로 미군이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치안 유지에 매달리는 미국

이처럼 이라크에서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후세인 정권을 타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새 정부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라크인 자신들이 합의해야 하고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미국이 힘을 행사해야 안보와 치안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당성을 창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힘과 정당성 간에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이라크와 전 세계에서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과제라 하겠다.

안병준 일본 정책연구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