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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질주본능 … 거침없는 춤사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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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그냥 취미 삼아, 혹은 튀기 위해 저러려니 했다. 그런데 철학이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는 게 거의 유일한 춤 연습”이라고 운을 뗐다. “춤은 중심을 잡고 몸마디를 나눠줘야 한다. 오토바이가 그렇다. 엉덩이를 살짝 띄운 채 몸통은 컨트롤 능력으로 유지하면서 팔·다리의 쓸 데 없는 동작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 호흡으로 휙 달려야 멋진 춤이 나오듯, 오토바이도 코너링을 돌땐 거침없이 내달려야 죽음을 피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갔다. “한국춤은 3분박의 곡선적이다. 그만큼 진동에 민감해야 한다. 그걸 난 오토바이를 타면서 체화한다.”

전통 춤꾼 김운태(45)씨는 그랬다. 잡초처럼 야전에서 혹독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독특한 춤 세계를 고집해 온 그가 마침내 제도권 무대에 선다. 28일부터 닷새간 한국 문화의 집에서 공연되는 ‘팔무전(八舞傳)’에서다.

정재만·임이조 등 인간문화재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춤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러나 익히 김씨의 춤솜씨를 본 사람들은 “묘기에 가까운 한판 놀음을 이제야 제대로 보여주게 됐다”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김운태씨는 80~90년대 사물놀이패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숨이 멈출 듯 뒤집기를 한 뒤, 몸을 가누지 못해 발을 질질 끌면서 나오는 흐트러짐이 가장 멋진 몸짓”이라고 말했다. [코우스 공연장=김성룡 기자]


#먹기 위해 춘다

그의 격렬한 춤보다 더 극적인 건 그의 삶이다. 김씨는 1963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11남매 중 여섯째였다. 아버지 김칠선씨는 호남의 유명한 한량이었다. 젊은 시절엔 좌익 사상에 빠져 빨치산 경험도 있었고, 종합무술 공인 5단을 자랑할 만큼 주먹도 꽤 휘둘렀다. 방랑끼마저 다분하던 아버지는 60년대 들어 ‘호남 여성 농악단’을 결성해 전국을 유랑하며 다녔다.

그의 큰누이는 한때 ‘여자 김일’로 불리던 프로레슬러 김홍이었다. 여성농악단이 낯선 곳에 천막을 치고 공연할 때면 그의 누이는 출입문을 지키는 기도를 봤고, 그게 또 볼거리였다. 김운태에게 떠돎과 놀이, 그리고 장단은 마치 유전자처럼 그의 삶을 지배했다.

소년 김운태가 처음 천막극장 무대에 선 건 여섯 살 때였다.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어수선한 공연의 첫 마당을 꼬마는 어릴 때부터 보고 익혀 온, 공중제비 같은 뒤집기로 시선을 모았다. 그렇다고 춤만 출 수도 없었다. 어떤 때는 소리를 한 자락 뽑아냈고, 어느 결엔 살풀이춤을 춰야 했으며, 징·꽹과리·장구도 칠 줄 알아야 했다. “축구 잘하는 선수가 달리기는 기본이잖아요. 15명 남짓한 농악단 멤버들이 각자 주특기는 있지만 다들 조금씩 악기·춤·소리를 다 할 줄 아는, 이른바 멀티 플레이어였죠.”

이런 유랑 생활은 1년 내내였다. 봄이 오면 구례 곡우제를 시작으로 진해 군항제·남원 춘향제·강릉 단오제·경주 신라문화제 등을 전전했다. “학교 세탁을 했다”는 그의 말처럼 초·중·고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음은 당연했다. 대신 그는 무대에서 생존력을 키워갔다. 단원들은 관객의 호응에 따라 철저히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먹을 양식과 돈이 배분됐다.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이 된 그는 두 몫·세 몫 제비는 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회 공연에 200회를 돌았고, 공연이 많을 때는 하루 1000회를 휘몰아쳐야 했다. “저에게 예술혼이란 사실 사치스러운 거였죠.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숨가쁘게 무대를 휘저었습니다.” 성인이 돼 나이트클럽과 요정을 드나들며 장단을 두드린 것도 그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춤은 ‘배움’이 아닌 ‘겪음’이다

그는 ‘채상소고춤’을 춘다. 소고라는 작은 북은 손에 들고, 상고를 머리에 쓴 채 돌리는 춤이다. 발끝으론 무대를 지르밟고, 손으로 소고를 두들기며, 머리론 묘기를 부리는 ‘따로 놂’이 춤의 기본이다. 무엇보다 공중을 휘휘 도는 ‘자반뒤집기’는 관객의 심박수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그 역시 심장을 태울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극단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그는 “발을 무대에 내려놓는 착지 순간보다 공중에 붕 떠있는 체공이 더 안전해질 때 내 춤은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는 따로 춤을 배우지 않았다. 그의 40년 인생의 ‘겪음’이 그대로 묻어날 뿐이다. 그래서 그는 공연을 앞두고 별다른 연습도 하지 않는다. “습관적인 연습이 오히려 알리바이가 돼 몸을 고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오히려 평상시 그는 음악에 젖어 있을 뿐이다. 음악을 몸안에 담아 ‘속박자’를 우려내고, 사뿐한 걸음걸이와 숨을 고르는 ‘휴지 동작’으로 자세를 가다듬은 뒤 이를 무대에서 그대로 폭발시키는 ‘즉흥’만이 있을 뿐이다. “춤의 동선을 짜선 안된다. 어떻게 출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다. 이 무대가 과연 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에만 몰입한다”고 그는 말한다. 재야를 떠돌던 무림의 고수는, 과연 대중에게 어떤 흥과 한을 선사할까.

최민우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8인 8색 ‘팔무전’은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서울 대치동 한국문화의집 코우스(KOUS) 공연장에서 열리는 ‘팔무전’은 8인 8색의 전통 춤판이다.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한 이는 정재만(60)씨다. 무형문화재 ‘승무’의 예능 보유자인 그는 이번엔 하얀 명주수건을 들고 살풀이춤을 춘다. 굿판에서 즉흥적으로 춰 ‘허튼 춤’으로도 불리는 춤이다.

한량의 멋이 느껴지는 한량무도 빠질 수 없다. 서울시 무용단장을 겸하고 있는 임이조(58)씨는 조선시대 남사당패가 마당극 형식으로 추던 것을 1978년 국립극장에서 독자적인 한량의 춤으로 재구성해 그만의 세계를 정립해 왔다.

4대에 걸쳐 밀양북춤을 추며 전통의 맥을 잇는 하용부(53)씨는 굿거리장단에 북을 울리면서 엇걸음으로 춤을 춘다. 한국춤 가운데 가장 기교적인 발짓이라 할 수 있는 태평무를 오히려 담백하게 추는 박재희(58)씨의 무대도 빠질 수 없다. 이 밖에 박경랑(교방춤)·이정희(도살풀이춤)·진유림(승무)씨 등도 섬세하고 촘촘하게 무대를 재단한다.

코우스 공연장은 이번 공연을 계기로 전통 춤 전문 공연장을 표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02-567-8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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