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후지쓰배 세계 선수권] 항복 같은 타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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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준결승>
○·이창호 9단 ●·류 싱 7단

제15보

◆제15보(206~230)=운이냐, 실력이냐. 승부는 매번 이 질문에 봉착한다. 한국 여자 양궁팀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란 극찬을 들었지만 개인전에서 졌다. 실력이 모자랄 리 없는 한국 선수들의 패배를 ‘불운’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운이란 거의 대등한 실력에서만 작용한다. 역도의 장미란 선수처럼 압도적인 실력일 경우 운이 개입할 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승부에서 운의 그림자가 감지된다. ‘부상’도 있고 ‘판정 실수’도 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운도 실력이라는 것. 피곤하니까 그만 따지자는 얘기다. 바둑은 운이 개입할 여지가 작은 승부라고 하지만 경기에선 가끔 두 점 바둑에서도 진다. 경기는 특수 환경이다. 올림픽 같은 큰 승부가 되고 보면 중압감은 몇 배로 커질 것이다. 이 중압감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선수 중에서 운 좋은 승자가 나오는 것 같다.

206으로 최후의 승부 패가 시작됐다. 백은 한 수 늘어진 패라는 게 자랑. 210으로 먹여쳤을 때가 흑의 기로다. 단패를 꿈꾼다면 A로 따내야 한다. 그러나 하변 대마가 못 산 상태에서 패를 끌고 나가기는 너무 힘겹다. 211로 잡아 대마부터 살린 것은 타협책. 이젠 B도 들어갈 수 없어 두 수 늦은 패가 되었지만 대신 작은 팻감도 마음놓고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구경꾼의 평가는 냉혹하다. “두 수 늦은 패는 패도 아니다. 중앙 흑이 거저 죽었는데 이 장면에서의 타협은 항복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좋은 바둑이었건만 중국 신예 류싱은 이렇게 마지막을 맞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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