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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대만의 미스터 클린 … 8년 만에‘부패의 화신’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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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천수이볜 전 대만 총통이 14일 기자회견 도중 자신의 부패 혐의를 시인하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타이베이 AFP=연합뉴스]

8년 전 ‘대만의 희망’이었던 천수이볜(陳水扁·57) 전 총통이 ‘부패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수백 억원이 넘는 불법외화 도피 의혹으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고, 출국금지 조치까지 당했다. 집권 8년 동안 대만의 독립과 주체성 확립, 깨끗한 정부를 외쳤던 그가 파멸한 것은 뇌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대만 정치권 전역이 부패 스캔들에 휩싸일 가능성도 커졌다.

◇‘대만의 희망’=그는 국민당 철권 통치가 막바지 기세를 부릴 무렵이었던 1979년 국민당의 야당 인사 탄압의 대표적 사례였던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으로 정단에 등장했다. 대만 최고 대학인 대만대 법학과를 수석 졸업한 뒤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지 5년 만이다. 그는 빼어난 법논리에 입각해 야당 인사들을 변호하면서 일약 대만의 희망을 대변하는 젊은 법조인이 됐다. 81년 최다 득표로 타이베이(臺北)시 시의원에 뽑혔다가 85년 타이난(臺南)현 현장(도지사 격)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했다. 이 과정에서 선거운동을 돕던 부인 우수전(吳淑珍)이 집권당의 고의적 공격으로 보이는 자동차 사고에 의해 하반신 마비를 얻는다. 이런 명성 덕분에 우수전이 먼저 국회에 오르기도 한다.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우수전은 그래서 천수이볜에게는 평생의 반려이자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 89년 정식 국회의원이 된 천수이볜은 정교한 논리와 거친 입담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90년대 초반에는 국민당이 막대한 자금을 유용한 혐의가 있는 무기 구매안을 날카롭고 거칠게 파고들어 대만의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94년 첫 민선으로 뽑는 타이베이 시장에 올랐을 때에는 유흥업소 등에 대한 과감한 정리 작업을 펼쳐 “역시 미래의 대통령답다”는 중평을 들었다.

2000년 국민당의 롄잔(連戰) 후보를 누르고 총통이 됐을 때 그의 첫마디는 ‘청렴’과 ‘대만의 주체성 확보’였다. 그는 정치개혁으로 청렴한 정부를 실현하려 했다. 50년 가까운 국민당 정권의 정경유착 관행으로 대만인들이 염증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는 공무원은 물론 정치인들에게 기업인들의 뇌물을 받지 말라고 엄명했다. 자신도 모든 경비를 투명하게 처리하는 등 깨끗한 정부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는 대만의 독립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집권 초기 여론의 50%는 항상 그의 편이었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파멸의 길 들어서=2004년 어렵게 재집권에 성공한 천수이볜은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주위에선 끊임없이 부패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집권 8년 동안 밝혀진 친인척 비리만 10여 건에 달한다.

대만 정치분석가들은 “일용잡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던 그의 과거가 집권 후반기 친인척 부패로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스밍더(施明德) 전 민진당 주석은 한때 천의 동반자였지만 2006년 천의 부패를 거론하며 정권 타도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어릴 적 가난에 찌들었던 천은 집권 후반기 뇌물로 재산 늘리기에 집착했고, 이것이 부패 정치의 파멸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천이 주도한 대만 독립도 그의 파멸을 자초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특히 그로 인해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아야 했던 우수전에 대한 미안함이 그녀와 관련된 주변 친인척 비리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대만판 마르코스 사건”=천 총통은 지난 7년 동안 무려 10억 대만달러(약 333억원)의 자금을 자금 세탁 과정을 거쳐 해외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자금은 대부분 집권 당시 선거자금이거나 기업들로부터 받은 뇌물이었다. 대만 검찰이 17일 천 전 총통 부부를 출국금지한 이유다. 그러나 그의 부패 혐의는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동안 천의 비리 사건을 조사해 온 국민당의 추이(邱毅) 의원은 최근 대만 빈과일보(<860B>果日報)와의 인터뷰에서 “천은 2000년 3월에서 2007년 말까지 총 18억 대만달러(약 540억원)를 부인의 비서와 친인척 명의로 해외 은행에 입금해 놓았다”며 검찰 조사를 촉구했다.

중남미를 순방 중인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집권 당시 수천억 원대의 정치자금을 해외로 반출한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부패 사건이 대만에서 일어났다”며 “이는 대만의 수치”라고 말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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