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양궁, 명품에는 실력 이상의 무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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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 최고의 스타는 역시 수영의 박태환이다. 한국 수영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우리 세대에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인 줄 알았다. 8명이 겨루는 결승에만 진출해도 ‘대성공’이었다.

10년 전쯤 당시 대한수영연맹 회장이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앞으로 10년 후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쯤 딸 수 있도록 장기 투자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담당 기자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하나’ 하고 아예 기사를 몰고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내 눈앞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물론 올림픽 수영 금메달은 수영연맹이 장기 투자한 결실이라기보다 박태환이라는 걸출한 ‘명품’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이제 19세의 대학 1년생. 4년 후에는 미국 마이클 펠프스의 아성을 뛰어넘어 다관왕도 노려 봄직 하다.

최고의 스타는 박태환이지만 오늘은 박태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양궁 이야기다.

한국 양궁이 세계 정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그 실력은 또 증명됐다. 금메달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그것이 양궁 대표팀에는 큰 짐이 된다는 것도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압박을 극복하고 여자단체는 6연속, 남자단체는 3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말 그대로 정상을 지킨다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다. 경쟁자 모두가 챔피언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챔피언을 꺾기 위해 약점을 분석하고 철저히 대비한다, 챔피언은 노출돼 있지만 도전자는 숨어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20년간 한번도 정상을 내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실력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그 ‘무엇’을 봤다. 하필이면 홈팀 중국과 결승전이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선수가 조준할 때마다 중국 관중석에서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너무나 유치하고 몰상식한 행동.

테니스에서 서비스를 넣을 때 관중석에서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된다. 골프 티샷을 할 때 휴대전화가 울리거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면 선수들이 곧 플레이를 중단하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하물며 더욱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사격이나 양궁에서 ‘정숙’은 기본 사항이다.

한국 선수를 방해하기 위해 떠드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호루라기는 심했다. 그런데 그때 한국 선수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스쳐갔다.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정도로 내가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곤 10점, 9점을 차례로 명중시켰다. 호루라기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20년 동안 정상을 놓치지 않은 비결이구나. 양궁 대표팀은 실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그려 놓고 시뮬레이션을 했다. 대형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고 연습하거나 시끄러운 야구장에서 훈련하면서 배짱을 키웠다.

‘축구 신동’으로 불렸던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다치지 않는 것도 실력”이라는 말을 했다. 모든 팀으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았던 마라도나는 상대가 어떤 식으로 거칠게 나올지 예상하고 그에 대비했다는 말이다.

‘실력은 있는데 운이 없어서, 다쳐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음식을 잘못 먹어서’라는 말은 결국 ‘정상에 오를 실력이 2% 부족하다’는 말과 통한다.

연일 계속되는 한국 선수들의 금메달 소식에 청와대에서도 싱글벙글한다는 소식이 베이징까지 들려온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온갖 악재에 시달린 터라 올림픽이 모처럼 웃음을 찾게 해준 청량제일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와 정부가 그냥 국민과 똑같이 기뻐만 하고 있다면 올림픽이 끝난 뒤 다시 웃음을 잃을 것이다.

현 정부와 청와대의 최대 약점은 바로 시뮬레이션 훈련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대비해 준비하고 연습해야 실전에 부닥쳤을 때 시행착오 없이 해결할 수 있다. 양궁 대표팀이 가르쳐 준 교훈을 정부와 청와대가 배운다면 베이징 올림픽이 주는 기쁨이 두 배가 될 거라는 생각이다.

손장환 올림픽 특별취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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