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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이 찬양한 ‘오리지널 와인’의 진실은-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2004)의 칠레 와인 예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5호 07면

최근 이태원에 ‘아는 사람만 아는’ 와인 집이 하나 생겼다. 어떻게 된 놈의 와인 집이 그 흔한 홈페이지는커녕 간판조차 달지 않았다. 심지어 출입문은 언제나 잠겨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드나들 수 있는가? 그저 ‘아는 사람’이 전화를 걸면 문을 열어줄 뿐이다. 나는 이 희한한 와인 집의 와인 담당(Wine Supervisor)이다. 덕분에 한가한 날 저녁이면 언제나 이곳에서 ‘아는 사람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곤 한다.

심산의 영화 속 와인

엊그제 이곳에서 아주 반가운 후배를 만났다. ‘타짜’(2006)로 유명한 영화감독 최동훈이다. 그날 밤 최 감독의 동행은 최근 신세대 프로듀서로서 주목받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였다. 우리 세 사람은 와인 병을 여럿 눕히며 오래도록 수다를 떨었다. 근사한 와인과 훌륭한 음악, 그리고 정겨운 대화가 편안하게 어우러진 아주 멋진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최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장르영화의 출현을 알린 기념비적 작품이고, 그해 네티즌이 뽑은 ‘최고의 한국영화’였다. 매우 복잡하되 잘 짜인 플롯도 일품이고, 오랜 취재 끝에 완성한 ‘생동감 넘치는 스토리의 세계’(사기꾼의 세계)도 인상적이었고, 몇 개의 유행어를 낳았을 만큼 입에 착착 달라붙는 대사발(!) 역시 근사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떤 뜻에서 ‘배우의 발견’ 혹은 ‘배우의 재발견’을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기꾼 세계의 존경받는 대가 김 선생 역의 백윤식, 구로동 샤론 스톤이라 불리는 팜므 파탈 서인경 역의 염정아, 욕심 많고 경박한 제비 역의 박원상, 약쟁이 사기꾼 얼매 역의 이문식, 약간 모자라는 듯한 위조 전문가 휘발유 역의 김상호 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연기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내가 ‘범죄의 재구성’을 다시 본 것은 이 영화 속에서 칠레 와인을 어떤 식으로 묘사했던가를 되짚어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의 주인공 창혁(박신양)이 학교를 졸업(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김 선생의 집으로 들이닥쳐 인경을 유혹하는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창혁은 와인 셀러를 죽 훑어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지껄인다. “칠레 와인은 없네?” 바야흐로 장황한 칠레 와인 예찬이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아니 뭐 프랑스 거 못 마시는 건 아닌데…거 2차대전 때 독일 놈들이 프랑스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었잖아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겠어? 그런데 포도밭은 남아났겠느냐고? 오리지널 그냥 다 타서 없어졌지! 그러고 나서 다시 심었는데 뭐 포도 자라는 데 하루 이틀 걸리나? 근데 칠레에는 오리지널이 남아 있다 이거죠. 잘 모르는 사람들이 프랑스 와인, 프랑스 와인 찾더라고?”

곧이어 창혁은 김 선생의 와인 셀러를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이거 제정신이야? 여기 불을 환하게 켜놓고…이거 썩었어, 썩었어!” 당황한 인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창혁은 더욱 신이 나서 몰아붙인다. “와인은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데! 사람하고 똑같아요! 사람은 여기 차지?” 그러면서 그는 인경의 귓불을 만진다.

“여기는 살짝 따뜻하고?” 이번에는 볼을 만진다. “이런 덴 더 뜨뜻해요.” 목덜미다. “이런 덴 더 얘기할 것도 없고….” 이제 엉덩이까지 더듬어 대자 그제야 눈치 챈 인경이 창혁을 와락 밀쳐 낸다. “어유, 순 사기꾼 아니야?!”

먼저 와인 셀러와 온도에 대한 이야기는 백 퍼센트 옳다. 김 선생은 와인랙만 근사하게 짜 놓았지 냉각송풍기(쿨러)를 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명까지 환하게 밝혀 놓았다. 와인 셀러로서는 최악의 설비인 셈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프랑스의 오리지널 포도밭은 다 파괴되었는데 칠레에는 그것이 남아 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실의 일부이지 그 전부는 아니며 핵심을 비껴간 이야기다.

전쟁 때문에 포도밭이 훼손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없고 칠레에는 오리지널이 남아 있다”고 할 때의 키워드는 전쟁이 아니라 ‘필록세라(Phylloxera)’여야만 한다. 필록세라는 미국산 포도 품종에 기생하는 진딧물의 일종이다. 미국산 포도 품종은 필록세라에 대하여 자생적인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와인을 만드는 유럽산 포도 품종(Vitis Vinifera)은 필록세라에 노출되면 그대로 말라 죽고 만다. 필록세라가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포도밭을 황폐화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의 일이다.

필록세라가 유럽의 포도밭 전체를 황폐화한 19세기 말에 이르면 “이제 더 이상 인류는 와인을 마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와인 생산자들은 끝내 해법을 찾아냈다. 미국산 포도 품종을 심어 필록세라를 이겨낸 다음 유럽산 포도 품종으로 ‘접목’을 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유럽의 와인 양조용 포도나무들은 거의 대부분 뿌리는 미국 종으로 되어 있고 그 위는 유럽 종으로 변형되어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쟁과는 무관한 상황이며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이른바 ‘필록세라 프리존(Free Zone)’으로 꼽히는 나라가 있다. 그곳이 바로 칠레인 것이다.

칠레의 와인 생산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격다짐 식의 자부심(?)은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누군가 “프랑스 카베르네 소비뇽은 저런 맛이 나는데, 칠레 카베르네 소비뇽은 왜 이런 맛이 나지?”라고 물으면 그들은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대답한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원래 이런 맛이 나는 거야. 이게 오리지널이라고! 칠레 이외의 지역에서 자라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미국 품종에 접목한 거잖아.” 칠레 와인 예찬자가 즐겨 사용하는 레토릭이다. 영화 속의 창혁도 이런 식으로 사기(?)를 쳤다면 보다 그럴듯하게 들렸을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한국에서의 칠레 와인 붐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다음에 최 감독을 만나면 몇 가지 물어볼 일이 생겼다. 필록세라가 아니라 전쟁 이야기를 한 것은 잘못된 정보 때문이었는지, 혹은 대사가 너무 길어질까 봐 고의로 조정한 건지? 또 하나, 처음 시나리오에는 칠레 와인 대신 글렌피딕(위스키) 예찬이 들어 있었는데 어째서 변경된 것인지? 만약 협찬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면 글렌피딕으로서는 뼈아픈 실수를 범한 셈이 된다.


심산씨는 ‘심산의 와인예찬’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심산의 시나리오 워크숍’ 등을 썼으며 현재 심산스쿨(www.simsanschool.com)에서 시나리오와 와인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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