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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변절 논란 “지금이라면 달리 움직였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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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민석(44·사진) 최고위원. 만 38세의 젊은 나이에 집권여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때만 해도 거칠 게 없었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을 법했다. 하지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하고 대선 정국에서 변절자 논란에 휩싸이면서 순식간에 정치적 폐인으로 전락했다. 5년 넘게 낭인으로 떠돌던 그가 지난달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2등을 차지하며 정치일선에 복귀했다. 다시 돌아온 ‘정치 풍운아’ 김민석. 6일 오후 여의도 개인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질문은 곧바로 그의 폐부를 향했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졌을 때 기분이 어땠나.

“기분요? 안 좋았죠(허허). 주변에선 정치상황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후보의 준비 부족 탓으로 봤다. 더 적극적이고 포지티브한 어젠다를 갖고 있었으면 돌파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게 없어서 밀렸던 거다. 이후 늘 어젠다와 이슈 중심으로 보는 습관이 몸이 뱄다. 그 패배가 내겐 엄청난 약이 됐다.”

-2002년 대선 이후 변절자라는 세 글자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담담한 목소리로) 내가 선택하고 감수했던 일이다. 극복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 또한 값진 경험이었고 큰 교훈이 됐다.”

-똑같은 상황이 오면 다시 그렇게 할 건가.

“아니, 그럴 생각은 없다. 달리 움직였을 것이다. 목표는 같은데 움직임이 달랐을 것이다. 당시 최고의 목표는 민주개혁세력의 정권 재창출이었다. 이를 위해 후보 단일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걸 이루는 방식으로 내가 선택한 거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내가 예측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기다렸다.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훨씬 신중하고 지혜롭게 처신했을 것이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며, 시기와 방법도 잘 선택하고. 기본적으로 내가 안 했으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선거도 지고, 의원 배지도 떼고, 대선에서는 만신창이가 됐다.

“정치적으로 시체가 된 것이다. 거의 관 속으로 들어갔었다. 이제 (최고위원이 되면서) 겨우 동면에서 깨어나기 위해 해동실로 들어간 셈이다.”

대선 후 그는 해외로 나갔다. 중국 칭화대와 미국 뉴저지주립대에서 법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았다. 학생 신분으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다시 정치에 발을 디뎠다. 그 속내가 궁금했다.

나만의 어젠다가 있는 정치 할 것

-왜 다시 정치권에 돌아왔나.

“(잠깐 호흡을 고른 뒤) 대중공포증이 극복됐기 때문이랄까. 2002년 이후 나처럼 포화에 가까운 비난을 경험한 정치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난을 넘어 냉소의 대상이 되는 시기를 거쳤다. 대중 앞에 서서,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내 생각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제 겨우 심리적 회복, 부닥쳐 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그게 내겐 정치복귀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정치는 왜 하려고 하느냐.

“나는 국가주의자다. 파시스트는 전혀 아니고(웃음). 나라가 잘돼야 국민이 잘 먹고 잘산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 20대를 지나면서 그쪽에 내 달란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5년 서울대 학생회장이 된 뒤 한시도 쉬지 않고 국가적 과제에 대해 고민해왔다.”

-어떤 정치를 하고 싶나.

“어젠다가 있는 정치와 판 메이커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자리를 얻었느냐로 평가받는 게 아닌 것 같다. 집권하고도 나쁜 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지 않으냐. 빌 클린턴의 선거참모였던 딕 모리스는 신군주론에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조직도 아니라 이슈라고 했다. 맞다. 나도 여러 이슈와 어젠다를 준비 중이다. 조만간 아주 다양하고 많은 이슈를 던질 것이다. 던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일로 만들어갈 것이다. 일에 대해서는 욕심도 있고 자신도 있다.”

-어젠다를 일관되게 추진한 정치인을 꼽으라면.

“DJ와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 대통령?

“그렇다. DJ와 케이스는 좀 다르지만. DJ는 남북 화해라는 일관된 어젠다를 추구해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으로서 청계천이란 어젠다가 있었다.”

-청계천을 어젠다로 볼 수 있나.

“하겠다는 의지, 명확한 이슈가 있었던 거다. 그는 그게 있었고 나는 없었다. 이 대통령의 비극은 대통령이 된 뒤에는 어젠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운하를 들고 나왔지만 어느새 실종돼 버렸다. 그 외에는 준비된 어젠다가 없었다. 지도자는 몇 가지 그만의 어젠다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개인의 좌절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어느새 현실정치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숨을 좀 고를 필요가 있었다.

-봉하마을에 갔다 왔는데.

“2002년까지만 해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둘 다 민주당엔 드문 PK 출신이고. 92년 대선 때는 청년특위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아 한 달간 붙어다녔다. 심지어 그가 야인생활을 할 때 라디오에서 시사프로를 잠시 진행했는데 제 아내(김자영 아나운서)가 공동진행자였다. 무지~하게 가까운 사이였다. 2002년은 개인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가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재밌게 얘기를 나눌까 한다.”

-송영길·안희정 최고위원과 386 트리오를 형성했다.

“둘 다 매우 친하다. 안 최고위원이 감옥에 갔을 때는 가끔 면회도 갔다. 매우 높게 평가하는 정치인이다.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

-정몽준 의원은 좀 만나나.

“대선 이후 한두 번 봤을까. 얼마 전에도 국회 주변에서 우연히 만난 적은 있다.”
그의 대답은 똑 부러졌다. 말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정리해 놓은 논리와 견해를 주저함없이 풀어놓는 듯했다. 2002년에 봤던 완벽주의자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현장에서 부대끼며 검증받겠다

-재승박덕하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지난 몇 년간 정말 많이 굴렀다(웃음). 변했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더 노력해야죠. 스스로도 많이 편해졌다. 감사한 것은 젊은 나이에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젠 혼자 가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잘 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는 점이다. 남 잘돼서 내가 그 덕 보는 정치를 하고 싶다.”

-빈틈을 주지 않는 이미지는 여전하다.

“더 망가지면 되겠죠(허허). 완벽한 사람은 없다.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 현장에서 부닥치는 방법뿐이다. 이번에 전당대회에 뛰어든 것도 현장에서 거듭나기 위해서다.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검증받고 싶었다.”

-보궐선거에 나갈 생각은.

“전혀 없다. 서울시장도 생각 없다. 앞으로 5년은 내 선거보다는 판을 만들어 정권 창출에 기여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2010년 서울시장 선거다. 필승 후보를 찾아야 한다. 이미 안팎에서 큰 관심과 레이더를 가지고 찾고 있는 중이다.”

몸을 거듭 낮추려는 모습과 치밀하게 준비된 답변 곳곳에서 와신상담한 흔적이 엿보였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또 한번의 기회를 위해 어두운 터널 속에서 절치부심했으리라. 그리고 이젠 나갈 때가 됐다 싶어 과감히 뛰쳐나왔으리라. 여기서 드는 의문들.

과연 그는 바닥까지 갔다 온 것일까. 그의 거듭남을 대중은 너그러이 받아줄 것인가.

그의 어젠다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인터뷰 뒤에 남은 물음표들은 앞으로 그를 주시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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