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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빠삐놈’을 알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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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 중에도 ‘빠삐놈 병神 디스코믹스’(이하 ‘빠삐 디스코’)라는 제목의 리믹스는 단연 압권으로 꼽힌다. 올 여름 최신가요를 총망라하다시피했다. ‘디제이 쿠’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구준엽의 ‘렛 미’, 전진의 ‘와’, 엄정화의 ‘디스코’, 이효리의 ‘유 고 걸’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각종 인터넷 문화의 본산으로 꼽혀온 사이트 ‘디씨인사이드’에서 무려 4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이를 만든 네티즌(아이디 디제이늅)은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자신을 “평범한 컴퓨터 관련 회사 직장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인터넷에 올린 글을 통해 “다들 같이 만든 것”이라며 공을 나눴다.

그의 지적처럼 ‘빠삐 디스코’의 등장과정은 댓글이 댓글을 부르는 인터넷 문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놈놈놈’과 ‘빠삐코’를 단순 결합한 최초의 합성물(제목은 ‘놈놈놈삐코’)을 시작으로, ‘빠삐놈’(+디제이 쿠)과 ‘전삐놈’(+전진)을 거쳐 등장한 ‘빠삐 디스코’(+엄정화·이효리 등)는 앞서의 합성요소를 고루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음악파일로만 등장했지만 곧바로 또 다른 네티즌이 각종 뮤직비디오를 합성해 동영상으로 완성했다. 네티즌들의 의도하지 않은 집단창작인 셈이다.

‘빠삐 디스코’는 특히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을 키워드로 내세운 안목 역시 돋보인다. 엄정화의 ‘디스코’처럼 전자음이 특징적인 댄스곡들뿐만 아니라 ‘학원-통신-병원-약국’을 반복하는 모 카드회사의 CF 음향도 절묘하게 결합했다. 인간의 목소리를 변조한 기계음과 반복성은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씨는 “영화부터 가요까지 2008년 여름 대중문화를 총화한 듯한 리믹스”라며 “창작자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대중문화를 수용하는 의외성이 재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지난해 UCC열풍을 일으켰던 각종 ‘텔미’동영상과 비교했다. ‘여고생 텔미’‘군인 텔미’등이 원더걸스의 원곡과 안무를 벗어나지 않고 노는 방식이었다면, 빠삐놈 리믹스는 다양한 원곡을 잘라 붙이고(cut and paste), 뒤섞어(mash-up) 노는 새로운 단계의 UCC라는 지적이다.

리믹스, 즉 뒤섞기는 음악만 아니라 다른 문화장르에도 곧잘 등장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혼성모방 기법이나 할리우드 영화의 장기인 리메이크·패러디·오마주 등도 과거의 콘텐트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창작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최근의 빠삐놈 리믹스는 이를 상업적 목적이 아닌 놀이의 방식으로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영화포스터에 정치인 얼굴을 붙인 패러디물처럼, 과거 그림합성 위주였던 놀잇감이 이제 소리와 영상으로 확대됐다. 문화평론가 김종휘씨는 “개인이 쉽게 영상과 음원에 접근할 수 있고, 이를 뒤섞어 1차 콘텐트와 다른 2차 콘텐트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디지털 개인 미디어 시대의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놈놈놈’역시 일종의 리믹스라는 점이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영화에서 제목을 따왔으되, 이를 리메이크하는 대신 ‘만주웨스턴’(일제시대 만주를 무대로 한 1960~70년대 한국식 서부극)의 설정과 뒤섞어 새로 만들어낸 영화다. 공교롭게도 여러 인터뷰에서 김지운 감독은 “송강호를 원시인으로 고인돌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라고 농담 섞인 차기작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빠삐코’의 원조CF는 박수동 화백의 만화’고인돌’의 캐릭터들로 만들어졌다.

이후남 기자·남윤서(서울대 국어교육 4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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