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속박 풀린 급진주의 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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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월 ‘악의 축’ 발언을 한 이후 지금 미국의 중동 정책은 중대한 변화의 시점에 와 있다. 그간 부시 외교 정책의 패러다임은 온건주의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극단주의 국가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창의력 없는 이스라엘 지도부와 급격한 변화를 꺼리는 아랍 국가(대표적으로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들이 추종했지만 이 모델은 결국 실패했다. 부시가 경제 제재, 외교적 고립, 군사적 행동을 통해 패퇴시키려던 극단주의 세력들은 살아남았다. 이제는 온건주의 세력이 정책 변화를 모색할 때다.

하마스를 가자지구에서 쫓아내거나 혹은 하마스로 하여금 국제 사회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게 하려던 이스라엘과 미국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하마스는 정치적 정당성을 얻었다. 테러 단체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정책 공조도 깨졌다. 하마스는 이제 이스라엘 도심뿐 아니라 군사시설에 전략적 위협을 줄 정도로 커졌다.

미국과 온건주의 아랍 국가의 지지 아래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상대로 벌인 2006년의 레바논 전쟁도 실패였다. 헤즈볼라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군사세력으로 성장했다.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를 요구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1701조는 유명무실해졌다. 헤즈볼라의 또 다른 후원자이자 ‘악의 축’ 중 하나인 시리아도 번성하고 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2005년 레바논에서 자국군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바논 정부가 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알아사드의 영향력은 다시 회복됐다.

이란의 핵개발을 멈추려는 미국의 시도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미국은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멈춰야만 대화를 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뒤집었다. 이란과의 직접대화를 위해 윌리엄 번스 차관을 파견하고,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이란에 이익대표부 설치를 검토하기로 한 것은 미국의 대이란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에 섣불리 군사행동에 나서지 말라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손이 묶인 미국은 이슬람 세계를 대상으로 제3의 전선을 또 만들길 꺼린다.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외교정책이 막을 내리면서 부시는 시리아·이란과 대화하는 정책이 주는 여러 혜택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두 국가를 무시하고는 중동의 안정을 꾀할 수 없다. 그들은 레바논 정치의 주요한 세력이며, 이라크를 안정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중동 안정을 해치는 강대한 정치·군사 세력인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태도를 바꾸게끔 하는 데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 이들의 하마스에 대한 영향력은 팔레스타인 전선을 안정시키는 데도 꼭 필요하다. 이뿐 아니라 이란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만이 중동 지역의 핵전쟁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부시 행정부의 태도 변화는 악의 축 국가들이 악을 퍼뜨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비이성적 집단들의 모임이라는 오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떤 국가가 급진주의적 목표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꼭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리아나 이란, 북한까지도 국제사회에서 버림받은 국가로 전락하길 원치 않으며 그들 역시 고립이 가져올 경제적 폐해를 잘 알고 있다. 테러와 혁명을 퍼뜨리는 게 그들 정책의 전부는 아니다. 그들 역시 협상 가능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들 또한 불안정의 정치가 가져올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고, 자신들의 정치적· 전술적 고려에 초점을 맞춰줄 좀 더 대화에 기반한 미국 행정부의 등장을 바라고 있다.

슐로모 벤아미 전 이스라엘 외무장관
정리=최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