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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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3부 선화공주(善花公主) 쌍화점(雙花店) ④ 『여보세요.』전화 소리가 한참이나 울린 다음에야 육중한 음성이 수화기를 덮었다. 『저,김아리영입니다.』 『아,네.안녕하십니까? 연옥이 애빕니다.』 정여사 남편이었다.어쩐지 주눅드는 기분으로 아리영은 허둥지둥 문안인사를 덧붙였다.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정여사님 계십니까?』 『요즘 집에 없습니다.』 어두운 목소리였다.
『어디 여행이라도?』 『…몸이 성치 않아 연옥이네 집에 가서쉬고 있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다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따님댁에? 많이 편찮으신가요?』 이상한 일이었다.몸이 불편하다는 사람이 딸의 시댁에 가있단 말인가.
『이렇다할 병은 없다는데 내내 아픈 꼴입니다.공기 좋은 데서보양하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연옥의 시고모되시는 분이 기어이 데려갔습니다.』 뜻밖이었다.
『편찮으신 걸 전혀 몰랐습니다.진작 문안드렸어야 하는데….따님댁에 전화드려도 될까요?』 번호를 묻고 수화기를 놓았다.「이렇다할 병은 없다는데 내내 아픈 꼴」이라니,왜 그런 것일까.
당장 그 번호를 눌렀다.
『약초원입니다.』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여인이 받았다.「시고모」라는 사람일 것이다.
『죄송합니다.연옥씨 어머님의 친구되는 김아리영입니다.그리 가계시다는 얘기를 듣고 문안드릴까 하여 전화했습니다.』 『네….
죄송합니다만 전화는 일절 안받고 있어서….성함과 전화번호를 주시면 본인과 상의하여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점잖게 거절당했다.이렇다할 병도 없다면 분명히 중환자는 아닌데 왜 전화도 받지 않는 것일까.노이로제같은 것인가.
아리영은 서둘러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내일 아침 이자벨과 함께 애소를 데리고 도쿄로 떠나야 한다.병문안을 간다면 오늘밖엔 당분간 기회가 없다.
부랴부랴 언덕길을 내려가며 깨달았다.이렇게 서둘러 집을 나선것은 우변호사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사실이다.정여사 일이궁금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나절 집에 있으면 틀림없이 우변호사의전화를 받게 될 것이고 만나자고 사정해■ 것 이다.사정에 응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거절하자니 가슴이 다시금 통째로 엘것 같았다.
자기로 인하여 육신의 쾌락에 눈뜬 아리영이 결코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함을 우변호사는 넘겨다보고 있는 듯했다.그것이 못견디게 화났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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