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공사 사망 1년째 미스터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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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9일 중국 현지 병원에서 숨진 황정일 주중 공사의 영결식이 부인(왼쪽)과 아들, 딸(오른쪽) 등 유가족과 외교부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2007년 7월 29일 베이징(北京)의 중국 병원 비스타클리닉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황정일 주중 공사는 당초 사인과 관계없는 급성위염이란 진단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공사가 병원을 찾았을 때 상복부 통증 등 심근경색 징후가 있었음에도 의사는 그 가능성은 아예 배제한 채 급성위염으로만 진단한 것이다. 이런 사실이 문제가 되자 병원이 ‘심장을 진료한 듯’ 차트 일부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아울러 황 공사 사인의 정밀 조사에 필요한 투여 약품 등 관련 필수 원자료가 중국 당국의 규정 미비로 확보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중앙SUNDAY가 입수한 황 공사에 대한 병원의 진료 차트, 부검 결과, 베이징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1·2차 한·중 전문가 회의 녹취록’, 대사관과 중국 병원 측의 3차에 걸친 협의요록 등 12개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상복부 통증 심장질환 가능성 무시

2007년 9월 14일 베이징 인민정부 회의실에서 열린 ‘2차 한·중 전문가 회의 녹취록’에 따르면 비스타클리닉의 우시아오이 의사는 황 공사에게 급성위염 진단을 내리고 이에 따른 처방을 했다. 그러나 약물 투여 10분 만에 황 공사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지됐다. 국립경찰병원의 안석진(심장의학과) 박사는 “진료 차트를 볼 때 혈압이 90/60㎜Hg로 아주 낮았고 구토를 하며 상복부 통증을 호소했다면 반드시 심근경색을 고려했어야 했다”며 “그런데도 심전도 검사 등 적절한 검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두 차례에 걸쳐 600㏄에 달하는 과도한 양의 수액을 처방해 황 공사의 심장 상태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응급 상태에서 한 심폐 소생술에 대해서도 안 박사는 “이때 기도를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이에 대한 기록이 누락돼 있고 심장 모니터링도 제대로 안 돼 있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황정일 공사 사망 1주기를 앞둔 26일 강원도 원주 묘소에 세워진 남편의 추모비를 부인이 둘러보고 있다. 유족 제공

차트 조작 의혹과 관련, 안 박사는 “해당 차트의 심장란에 체크된 게 다른 부분과 모양이 다르다”며 “사후에 써 넣은 것 같으며 그렇다면 심각한 범죄”라고 했다.
원자료(raw data) 문제와 관련,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중석 박사는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해 원자료를 한국에서 분석할 테니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요청을 했으나 ‘확보 보관과 관련된 규정이 없어 원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중국 당국의 설명이었다”며 “그나마 있는 것도 변질돼 검사가 불가능하다고 중국 측은 설명했다”고 밝혔다. 또 “‘투여한 약과 동종의 약품 및 링거액을 다 조사했지만 해당 약품의 조사는 못 했다’는 답을 들었다”며 “규정이 그렇게 돼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많은 의문을 해소시킬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중국 병원은 사과조차 안 해

사고를 일으킨 병원은 유족에 대한 ‘인간적 사과’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처음부터 2000만~3000만원의 위로금만 지급하고 끝내려는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비스타클리닉의 무성의한 자세는 3차에 걸친 대사관과 협의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차 협의요록(8월 31일)에 따르면 사건 한 달 뒤 있은 대사관과 접촉에서 병원 이사장은 “위로금의 구체적 희망 액수를 포함해 가족의 요구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다. 처음부터 사고 보상이 아닌 위로금으로 단정했다. 구체적 액수도 제시하지 않았다.

대사관은 “공사 사망 직후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원만히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 이른 시일 내에 한국에 가라. 인간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지만 이사장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거부했다. 1차 협의를 하는 동안 병원은 사과보다 상대 카드에 더 관심을 보인 것이다.

2차 협의록(9월 10일)에는 병원의 고압적 태도가 더 심하게 나타난다. 이사장은 “사과를 위문금으로 표현하겠다. 지불 가능한 금액은 20만 위안(약 2500만~3000만원)”이라고 선을 그었다. 당시 유족과 대사관은 호프만식 계산에 따른 7억8000만원과 정신적 위자료를 더한 금액을 의식하던 때였다. 이사장은 나아가 “사건 이후 영업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임대료와 전기·수도료도 못 낸다. 병원이 망하면 지급하려 해도 힘들다”고 했다. 또 “위로금 액수 차가 너무 크면 감당하지 못하니 중국 국내법 절차로 간다” “중국 법 절차는 도움도 안 되고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등 협박성 발언을 했다. 당시 베이징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정재남 과장은 “병원은 처음엔 위장 폐업으로 버틸 생각이었던 것 같다”며 “그러면 한·중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압박해 막았다”고 말했다.

황정일 공사 병원 진료 차트, 부검 결과, 베이징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1·2차 한·중 전문가 회의 녹취록, 대사관과 중국 병원 측의 협의 요록 등 12개 자료.

9월 28일 3차 협의에서 병원은 속셈을 다 드러냈다. “대사관이 의료 사고로 몰아가려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사인과 병원 진료 간에 인과관계가 없음을 증명하겠다”고 했다. “전에 한 말은 다 무효”라고 선언했다.

정 과장은 “소송하면 2~3년 걸리고 유족의 소송 비용도 많이 들며 이겨도 최대 20만 위안을 주면 된다는 계산으로 병원은 버틴다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대사관 측이 중국 당국을 통해 ‘압력’을 행사해 10월 18일 병원 측은 위로금을 80만 위안(약 1억원)으로 올리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 보상은 아니며 액수도 유족과 너무 차이가 났다.

외교부, 전권 위임장 문제로 유족과 갈등

외교통상부는 황 공사를 순직 처리하고 국가유공자로 등록했다. 외교부는 중국 당국 및 병원과 접촉하고,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마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족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마찰이 계속되고 있다.

핵심은 ‘사과와 보상’ 문제다. 황 공사의 부인 박영주씨는 “순직 처리보다 병원의 사과가 더 중요하다. 순직은 포기할 수 있다고 누차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외교부 입장은 ‘순직 처리 뒤 의료 사고를 밝힌다’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초기 외교부 조치를 따랐지만 ‘원통함 해소’와 멀어지자 불만이 쌓여 갔다.

갈등은 병원 측이 요구한 전권 위임장 문제로 폭발했다. 협상 실무 대표였던 베이징 대사관의 김원진 참사는 2007년 9월 28일 박씨에게 메일로 위임장 서류를 보낸 뒤 서명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전체 중 1·2·4·5항을 제외한 3·6항만 제시했다. 3항은 보상금이 아닌 위문금을 준다고 돼 있었고 금액도 없었다. 6항은 ‘협상 결과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였다. ‘이상하다’는 의심을 한 박씨는 위임을 거부했다. 결국 10월 22일 대사관은 병원에 협의가 어렵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외교부는 사인 조사와 중국 당국 및 병원과의 협상에 나섰지만 유족과의 ‘뜻 차이’로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유족들은 외교부 장관에게 진정서·질의서를 제출하는 등 반발했다. ‘선의’에 관계없이 외교부의 책임 문제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후 대사관은 병원과 계속 접촉했지만 협상 진전은 없다.

 게다가 유족들은 “대사관·외교부가 순직 처리, 훈장 수여, 특별 승진, 국립묘지 안장을 약속했는데 순직만 실현됐다”고 서운해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위로 차원에서 했던 말이 오해를 일으켰다”며 “최선을 다해도 규정 때문에 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도처에서 유족과 외교부의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던 것이다.

중국 당국에 대한 대응도 아쉽다. 정 과장은 “중국 외교부, 베이징시 당국과 접촉했고 외교장관 회담 등 필요한 채널을 다 통했다. 중국 외교부는 ‘소송하면 최대한 도와준다’는 뜻도 표명했다”고 했다. 그러나 “민간병원이라 어려움이 있다”고 고백한다. 결국 ‘고위 외교관의 돌연 사망’이란 전례 없는 사고를 당했으면서도 중국 외교부를 넘는 대응 능력은 없다는 한국 외교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안성규·고성표 기자 취재지원 최창근 한국외대언론정보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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