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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조선-일본 학문 역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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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선은 명·청 시대 중국에 700회가 넘게 연행사를 보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일본에도 12차례 통신사를 파견했다. 조선의 외교사절은 정치·경제 교류뿐 아니라 당대 지식인으로서 국제적 지식 교류도 담당했다. 국경을 오간 조선의 선비로 인해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제 학술대회가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연행사와 통신사를 당시 국제적 학술교류의 측면에서 분석한 학술서적이 최근 나왔다. 조선시대 한·중·일의 지식인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명한 『연행사와 통신사』(신서원)다. 저자는 일본인 학자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토대 교수. 후마 교수의 논문을 번역해 한국에서 처음 책으로 엮었다. 대표 번역자인 정태섭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한국 학계의 선배격인 조선시대 선비의 국제적 교류를 조망하는 작업이 일본 학자에 의해 먼저 시도됐다”며 “국내 학계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학계에서 연행사와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을 종합해 당시 지식의 전파와 수용을 국제적 시야를 갖고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었다는 지적이다.

일본 학자는 당시 조선 선비들이 양국의 지식인과 주고 받은 필담(筆談)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조선의 지식세계를 해부했다. 평가는 냉정하다. 조선 선비들이 명·청 지식인과 대등한 입장에서 학예를 논했고 ‘한 수 아래’의 일본 학계에 학문을 전수했다는 한국 학계의 통설을 뒤집는다.

◇학술교류의 역류?=후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학문을 전수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1719년의 통신사였던 신유한(1681~1752)은 “『퇴계집』이 (일본의) 어느 집에서도 소리 내어 읽히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지만 18세기 중엽 이후로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조선이 송나라 때의 주자학에 매몰돼 있는 동안 일본은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에 의해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는 주장이다. 후마 교수는 “1764년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최신 학술정보 수집에 열성적이었다”며 “이때 양국의 학술관계가 이미 크게 전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지적 정체?=조선의 퇴계·율곡 학문에 대한 자존심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은 새로운 학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적 정체’를 낳았다는 것이 후마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1826년 연행사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신재식(1770~?)이 청나라 고증학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이 조선 선비는 16세기 이후 근래의 학자는 단 한 사람도 거명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동아시아 지식 세계에서 조선은 고립돼 있었다는 평가다.

정 교수는 “국내 학계가 후마 교수의 주장을 도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분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후마 교수는 조선·청나라·일본의 선비들이 붓글씨로 남긴 기초 자료를 해독하기 위해 수년간 초서 읽는 법을 따로 배울 만큼 학문에 집요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가 남긴 기초자료조차 국내 학계가 해독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 자료에 대한 해석의 권위도 일본 학계에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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