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점거? 생각할 수 없는 일 표결 끝나면 모두가 승복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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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섭옹이 국회 헌정기념관에 전시된 제헌의원들의 기념사진을 보며 당시의 인물들을 회고하고 있다. [사진=안성식 기자]

“분위기는 늘 엄숙했습니다. 화장실이라도 갈라 치면 의장에게 양해를 얻곤 했죠. 단상 점거 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권효섭(83)옹이 떠올린 60년 전 제헌국회의 분위기다. 1949년 초 국회 의사과 직원으로 입사했던 권옹은 헌법 제정 과정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농지개혁법·귀속재산처리법·국가공무원법 제정 등 제1대 국회가 숨가쁘게 해냈던 ‘나라 만들기’를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지켜봤다.

그는 제헌국회의 풍경을 육성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존자다. 제헌의원은 지난 2월 김인식옹을 마지막으로 모두 타계했다. 일본군에 입대해 동남아 전선으로 파견되길 기다리다 해방을 맞은 권옹은 “국회에서 경위를 뽑는다”는 제헌의원 서성달의 귀띔에 솔깃해 국회에 원서를 냈다. 경위로 뽑혔지만 배치된 것은 회의 진행을 돕는 의사과였다. 그렇게 맺은 국회와의 인연이 60~61년과 63~73년 의사국장을 거쳐 제9대 의원을 지낼 때까지 이어졌다. 권옹은 “반쪽짜리 국회다 뭐다 해도 다수의 구성원이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자들이었다”며 “회의에 빠지는 의원이 드물었고, 토론은 치열했지만 표결이 끝나면 모두가 결과에 승복하는 문화였다”고 했다.

국회는 서울 광화문에 있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행정 각부와 함께 썼다. 의원들은 보좌진도, 개인 사무실도, 승용차도 없이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권옹은 “의원들은 주로 전차를 타거나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던 시내버스를 통근용으로 임대해 타고 중앙청까지 출퇴근했다”며 “경찰 경호원이 한 명씩 일본제 구구식 소총을 메고 따라다니는 게 전부였다”고 당시 국회 풍경을 전했다.

국회의원의 위상과 권력의 상징물이 된 금배지도 없었다. 권옹은 “의원들이 금배지를 달게 된 것은 3대 국회 때부터”라며 “금광을 소유했던 자유당 소속 정명선 의원이 금을 기부하면서 ‘모두에게 금배지를 만들어 달라’고 제안해 성사됐다”고 회고했다. 권옹은 “몸싸움이나 장외투쟁이 잦은 요즘 국회를 보면 가난했지만 토론과 설득의 문화가 살아 있던 제헌의회 시절이 자주 떠오른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순)=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김종해 국회사무처 자료조사관, 서희경 진실화해위원회 팀장, 이영록 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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