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속에 여왕의 전설이 익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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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14면

어둡지만 청아한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과 달,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친 아름다운 여인이 보인다. 중앙에는 동화에나 등장할 법한 건물이 들어서 있고 주변에는 포도밭이 그려져 있다. 포도밭 사이로 보이는 야자수는 이야기의 배경이 더운 지역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레이블의 주인공은 ‘밀레 에 우나 노테(Mille e una Notte·천일야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150년 동안 한가족이 와인을 만들어온 돈나푸가타(Donnafugata)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최고의 와인이다.

와인 레이블 이야기 <8>

이 아름다운 레이블은에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와 전설이 연결돼 있다. 어느 날 한 아름다운 여왕이 나폴레옹 군대의 습격을 피해 나폴리에서 시칠리아 중부의 산타 마게리타 벨리스 근처로 숨어들어 은신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19세기 합스부르크 왕조의 여왕이면서, 나폴리의 왕이었던 페르디난도 4세의 아내 마리아 카롤리나. 그녀가 있었던 은신처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정확하게 알려진 바도 없다. 다만 현재 산타 마게리타 벨리스 근처 콘테사 엔텔리나 지역에는 방대한 포도밭이 들어서 있고 사람들은 이곳을 ‘돈나푸가타(여인의 피난처)’로 부르고 있다.

돈나푸가타 지역은 유명 소설가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거주하던 곳으로 그의 소설 『들고양이』의 배경이기도 하다. 『들고양이』는 1963년 영화로 만들어졌고 미국의 버트 랭커스터, 프랑스의 알랭 들롱, 그리고 이탈리아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함께 열연해 호평을 받았다.

돈나푸가타 와이너리는 1995년 콘테사 엔텔리나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특별한 와인을 만들었다. 새로운 와인의 이름과 레이블을 구상하기 위해 가족이 모두 모여 시음을 했고, 첫 시음자는 와이너리의 오너인 자코모와 그의 부인 가브리엘라였다. 특히 가브리엘라는 와인의 첫 모금에서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를 바로 떠올렸다고 한다. 다양한 이야기가 탄생하고 전해졌을 수많은 밤의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느낌을 가브리엘라는 이 와인의 맛과 향에서 경험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 와인을 통해 그 낭만적인 천일야화 속으로 여행하길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브리엘라는 이 느낌을 레이블에 그대로 옮겨놓기 위해 섬세한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여왕의 은신처’라는 동화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19세기 프린트물에서 한 왕궁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왕궁에서 얻은 영감과 『들고양이』의 작가가 살았던 거대한 저택 모습을 겹쳐 건물의 형태를 완성했다. 또한 이 와인이 탄생한 포도밭으로 왕궁을 감싸게 했다. 밤을 표현하기 위해 달과 별을 등장시켰지만 청초하고 낭만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밤하늘을 표현하는 데는 청색을 사용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밀레 에 우나 노테’ 1995년 첫 빈티지는 1998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이후 이탈리아가 지난 30년 동안 만든 ‘최고의 10대 와인’ 대열에 꼽히는 영광을 얻었다. ‘밀레 에 우나 노테’는 90% 이상을 시칠리아 품종인 네로 다볼라 포도로 만들어 더욱 토속적인 풍미가 느껴진다.

필자는 언젠가 완전한 정적이 흐르는 한밤중에 작은 시칠리아 포도 농가에서 와인 시음을 한 적이 있다. 중간에 잠깐 밖으로 나왔을 때 바라본 밤하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불빛 하나 없는 맑고 청량한 밤하늘에서 수없이 쏟아져 내리던 별들! 필자는 그날의 별빛 하나하나에서 느꼈던 맑은 기운을 잘 기억하고 있다. ‘밀레 에 우나 노테’의 레이블을 보고 있으면 그날 밤의 ‘끝없는 이야기’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다.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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