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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갈등이 불러온 뉴욕 극장의 관객 폭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847년 8월 4일 개관한 뉴욕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는 문을 연 지 2년 만인 49년 4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의 미국 초연을 유치할 정도로 이름 높았던 명소다. 불과 몇 년 만에 아티스트와 관객 모두가 기피하는 곳으로 전락해 결국 간판을 내렸고, 도서관ㆍ강연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아예 아파트로 바뀌어 버렸다. 1849년 5월 10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공연 도중 극장 바깥에서 21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중상을 입는 유혈 참사의 피비린내가 쉽게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무대에는 영국 배우 윌리엄 머크리디(1793~1873)가 맥베스 역으로 출연 중이었다. 1만5000여 명의 인파가 아침부터 극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미국 출신의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에드윈 포리스트(1806~1872)의 지지자들이 라이벌 머크리디의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팬클럽이 나선 것이다. 근육질의 검투사 역을 즐겨 맡았던 포리스트는 하류층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던 인물이다. 포리스트는 하류층의 영웅이었으나 상류층에서는 그를 업신여겼다.

250여명의 경찰이 극장 주변에 진을 쳤고 바리케이트까지 설치했다. 창문은 두꺼운 판자로 덮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군대도 대기 상태였다. 돌을 던지고 폭력까지 행사한 사람은 500여명. 대부분 10대 소년들이었다. 처음엔 경찰에 돌을 던지다가 경찰이 극장 안으로 피신하자 창문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엉성한 바리케이트로 부숴버렸다. 돌이 극장 안에 있는 객석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도들은 이웃 공사장에서 들고 온 돌과 도로 포장석을 뜯은 돌멩이로 극장 출입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찰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투입했다. 제7연대 소속의 2개 사단 병력이 극장 앞에 당도했다. 군중들은 군인들에게도 돌을 던졌다. 군대는 군중을 향해 세 발의 사격을 가했다. 하나는 머리 위로 공포를 쏘았다. 두번째는 다리 쪽을 향했다. 폭도들의 계속 공격해오자 세번째 포는 폭도를 직접 향했다. 포연이 사라지자 23명이 시체로 변했다. 멋도 모르고 극장 옆을 지나가던 행인도 몇명 아깝게 목숨을 잃었다. 난동 주모자 10명은 1849년 9월 재판을 받았다. 징역 1개월에서 1년, 벌금 250달러 등의 처벌이 내려졌다.

폭동 3일 전인 5월 7일에도 공교롭게도 뉴욕의 대표적인 극장 세 군데에서 맥베스를 상연했다. 포리스트는 브로드웨이 시어터, 매크레디는 애스토어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 바워리 시어터의 극장장인 토머스 햄블린은 자신이 주역으로 출연했다.

이들은 그날도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에 몰려가서 동전ㆍ달걀ㆍ레몬에 썩은 과일과 악취가 심한 진통제 약병을 머크리디에게 던졌다. 2층 발코니석에서 무대로 던진 의자가 머크리디의 발 앞에서 박살이 났다. 화가 난 머크리디는 더 이상 뉴욕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튿날 작가 허만 멜빌, 워싱턴 어빙 등 뉴욕의 오피니언 리더와 부유층 48명이 포리스트 지지자들의 난동을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이들의 간곡한 호소와 지지에 못 이겨 머크리디는 5월 10일 단 하루만 무대에 서겠다고 했다. 머크리디가 5월 10일 ‘맥베스’에 다시 출연한다는 벽보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포리스트의 팬들도 같은 날 ‘영국 귀족 나부랭이들이 드나드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고 격문을 붙였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나게 됐을까.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12분 거리에는1826년 개관한 바워리 극장이 있었다. 주변에 사는 아일랜드ㆍ독일ㆍ중국 이민자 출신의 하층민이 주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바워리엔 술집과 여관이 즐비했고, 애스터 플레이스가 위치한 브로드웨이엔 고급 주택가와 호텔이 들어섰다. 말하자면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는 부유층이 하층민과 극장에서 한데 섞이기 싫어 새로 지은 공연장이었던 것이다.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는 매년 75회 공연에 무료 티켓 한 장씩 5년간 주는 조건으로 50명의 상류층 신사들에게 1000달러짜리 주식을 팔았다. 티켓도 비쌌고 정장에 검정 장갑과 실크 조끼까지 착용할 것을 요구했다. 바워리 주민들에게 위화감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이들은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가 미국식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평등사상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포리스트는 이 점을 이용해 라이벌 배우가 뉴욕 무대에 발을 못 붙이도록 시위를 부추겼다. 포리스트와 그의 팬들은 영국 출신의 머크리디 때문에 포리스트가 빛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포리스트는 자신이 미국 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을 하고 있는데 미국 무대를 넘보는 머크리디의 등장으로 이같은 계획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것이다.

머크리디의 공연 소식을 접한 포리스트는 바워리 극장에서 ‘맥베스’로 맞불을 지폈다. 같은 작품으로 머크리디에게 도전하겠다고 언론에도 알렸다. ‘머크리디와 포리스트, 맥베스 역으로 맞대결’ 제목을 단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그도 모자라 포리스트의 팬들은 머크리디가 공연 중인 극장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애스터 플레이스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머크리디의 지지자들에게 무료 티켓을 나눠주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불길한 소문이 돌았고 뉴욕 시장은 극장 문을 닫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제작진은 공권력이 극장을 보호해 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맞섰다.

23명이 어이 없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과연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군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정부 당국자를 원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언론에 도발적인 편지를 보내 대중을 선동한 에드윈 포리스트를 원망했다. 더러는 이 라이벌 배우의 싸움을 부추긴 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매크레디에게 다시 무대에 설 것을 간청한 오피니언 리더들을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서면 반감을 일으킬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 두 명의 라이벌 무대는 결국 영국 출신의 귀족계급과 하층 서민의 불화로 번져 미국 군대가 미국인에게 발포하는 웃지 못할 비극을 낳았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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