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49인의 지성이 진단한 ‘가치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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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엮음,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620쪽, 2만5000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그 별빛이 훤히 길을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소설의 이론』(1920)의 이 유명한 문장에서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운명을 끌어낸다. 소설은 ‘신(神)에게 버림 받은 시대의 서사시’라는 것이다. 빛이 없는 시대,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세계, 신에 의지한 초월적 안식처가 사라진 세상에서 겪는 인간의 불안. 그것은 근대의 운명이기도 했다.

근대가 신에게서 버림 받은 세상이었다면 21세기는 인류가 스스로에게서조차 버림 받은 시대가 아닐까. 지난 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사회·윤리적 모든 가치가 의심 받고 있는 시대다.

9·11 테러 이후 세계가 겪는 ‘가치의 위기’에 대해 전세계 지성 49인이 진단을 내렸다. 자크 데리다·장 보드리야르·폴 리쾨르·제레미 리프킨·줄리아 크리스테바·나딘 고디머 등 이 시대 최고의 지성들이다.

“단 하나의 기하학이 있듯이 단 하나의 도덕이 있을 뿐이다”는 계몽시대 볼테르의 단언은 오래 전에 무너졌다. ‘단 하나의 도덕’이 남아 있다면 ‘무한 정의(Infinite Justice,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때 초기 작전명)’의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자들의 우려다. 49인의 지성들이 유네스코가 기획한 ‘21세기의 대화’ 포럼에서 발표한 54편의 글을 엮었다.

보드리야르는 세계화의 확산과 보편성의 확대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의 힘은 분리와 분열을 강제해 보편적인 것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보편성이 갖는 사회 통합적 성격이 사라지면서 기존 문화에서 ‘차이’라고 불리던, 존중 받던 가치조차 야만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테러리즘은 세계화의 궁극적 단계로서 바이러스처럼 편재해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린다.

‘21세기의 대화’ 기획은 무너진 가치 속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의 가능성을 고민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피하기 위한 인간 사이의 계약뿐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인류를 둘러싼 생태계와의 ‘자연계약’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철학·정치학뿐 아니라 유전학·우주론에 이르기까지 21세기 지성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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