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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함께>"한국을 대표하는 빛깔" 최승범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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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해마다 단오날이 오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창포물로 세수를 하고몸을 씻었다.긴 칼 모양을 따서 일명 「수검초」(水劒草)라 불렸던 창포의 잎사귀 빛깔은 남푸른색(翠色).사람에 따라선 청록색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여름에 바라보면 좀더 파랑이 짙은 취록색으로 보이고저녁 노을 아래서는 자주빛이 돋보인다.가을에 잎은 검누른빛(黃褐色)으로 시들지만 뿌리 빛깔은 여전히 붉은 갈색(赤褐色)이다. 전북대 최승범(崔勝範.64)교수가 오는 8월 정년을 앞두고최근 펴낸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문학아카데미刊)은 우리의 전통생활 속에 스며든 색깔을 이야기하고 있다.색에 얽힌 한국인의 심성을 들여다 본다고나 할까.제목만 보아서는 색채학 이론서같은 인상을 주지만 속에는 윗대 어른들이 즐겨온 여유로운 삶의색깔들로 가득하다.
『아스라히 멀어져간 고향의 색깔을 되살리고 싶었습니다.현란한색채에 파묻힌 현대인들에게 고즈넉한 마음씨를 선물하자는 생각이죠.』 崔교수가 선별한 빛깔은 모두 24가지.여러 색이 어울리는 복합색을 대표하는 것으로 무지개.단청.태극무늬.매화를 꼽고백색으로는 창호지.등잔불.농주 등 5종,청색 계열로는 옥.창포.쑥등 4종,적색으로는 감.고추잠자리.질그릇 등 7종 ,황색계열로는 메주.볏짚.유채꽃 등 4종을 들고 있다.
「고향의 빛」에 비유되는 황토빛을 보자.우리는 흔히 황토빛을노란색 계열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황토의 빛깔은 붉은 색.
시인 한하운은 『전라도 가는 길』에서 「붉은 황토빛」으로 읊었고 김지하 시집 『황토』의 빛깔도 핏자국 선연한 붉은 빛이다.崔교수는 여기서 콘크리트 더미에서 거무튀튀한 빛으로 변질해가는 고향의 붉은 흙내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제가 뽑은 색이 꼭 한국을 대표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색채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죠.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전통의 재해석이라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崔교수 전공은 조선시대시가(詩歌)문학.또한 그는 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시집 11권에 수필집 11권을 냈다.그런 까닭인지 이 책에는 윤선도.정약용.이규보.허균 등 조선의 문장가는 물론 이병기.조지훈.서정 주.박목월 등 한국문학 대표작가들의 색에 관련된 명문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여기에 崔씨의 장점인 간결한 문장과 감칠맛 나는 말결이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창호지를 보세요.원색은 흰 바탕에 약간 누런 빛이 돋는 색깔이나 햇빛.달빛의 명암에 따라 색이 달라져요.새벽에는 퍼런 빛을 띠지만 해질녘에는 벌겋게 되고 등잔불을 켜면 정감어린 등황색으로 변하지요.』 崔교수는 반면 현대인들의 유리창 빛은 사람사는 냄새가 사라진,이른바 멋이 상실된 빛이라고 단정한다.이에따라 현대인들의 심성도 빛의 굴절을 완상했던 선조들과 달리 눈앞의 현상에만 직선적으로 매달리는 조급증으로 퇴락했다고 지적한다. 『옛것을 무조건 수용하자는 주장은 아니예요.단지 사물에어린 색감을 계절 혹은 시점에 따라 풍부하게 음미했던 낙낙한 마음을 되찾았으면 해요.』 음식.소리.시조 등을 주제로 한국인의 가슴을 탐구한 적이 있는 崔교수는 앞으로도 선인들의 생활법도와 전북일대 누각과 정자,그리고 세시풍속을 통해 우리의 정서를 계속 추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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