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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외교 이야기] 만찬 메뉴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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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05년 2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브뤼셀 주재 미 대사관으로 초대해 만찬을 겸한 정상회담을 열었다. 부시 대통령은 식탁 위의 감자튀김을 가리키며 “이건 프렌치프라이군요”라고 말했다. 서양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음식 이름을 왜 부시 대통령이 굳이 상기시킨 것일까.

미국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개전에 반대하는 프랑스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미국에선 ‘프렌치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프렌치 토스트’를 ‘프리덤 토스트’라 바꿔 부를 정도로 ‘반불 감정’이 거셌다. 대통령 전용기에서도, 하원 식당 메뉴판에서도 프렌치(French, 프랑스의 형용사형)란 단어가 사라졌다. 감자 튀김에 제 이름을 되찾아준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불편하던 양국 관계가 말끔히 회복됐음을 확인하는 선언이었다. 정상 회담 등의 외교 무대에선 식사 메뉴까지 세심하게 조율되고 연출된다. 정치적 상징이나 신호가 숨겨져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상들끼리 함께 식사를 한다고 반드시 우호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은 아니다. 2005년 6월 서울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회담이 그 예다. 공동기자회견 막바지에 초청자인 노 대통령이 “오늘 저녁 식사는 가볍게 하겠습니다”고 말한 것이다. “많이 드시고 가시죠”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실제로 테이블에는 평소보다 가짓수가 줄어든 요리가 나왔다.

당시 독도와 역사인식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었고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큰 원인을 제공했다. 노 대통령이 ‘당신을 환대할 수 없다’는 뜻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가벼운 식사가 홀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10일 베이징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 개막 만찬이 그 예다. 중국의 영빈관인 댜오위타이에서 회의를 한 6개국 대표들은 정통 중화요리로 성찬을 즐기던 종전 관행과 달리 스탠딩 뷔페로 식사를 했다. 회담장에서 얼굴을 붉히던 대표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뷔페 음식을 들며 보다 솔직하게 의견교환을 하는 자리를 만들려는 의장국 중국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반면 7일 일본 도야코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의 호화판 만찬은 각국 언론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날 메뉴는 캐비아, 바다성게, 다랑어, 장어구이, 털게 수프, 새끼양 등심 등 모두 18가지였다. 주최국인 일본으로선 세련된 음식 문화를 과시하고 손님 맞이에 정성을 다했다는 인상을 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 정상까지 초청해 빈곤·기아 대책을 주요 의제로 논의하는 회의의 메뉴로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빈곤 문제와 기후변화 등 범세계적 차원의 현안을 논의하는 G8이 알맹이 없는 말잔치로 끝났다는 비판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모처럼의 호화 만찬은 더욱 빛이 바랜 느낌이었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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